사진: 커핑현장, 명동성당 커피 리브레점
1996년 미국에 잠시 살았다. 대학생들 사이에 해외 어학연수가 유행이었다. 나 역시 제대 후 복학 전 미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였는데, 홈스테이, 즉 하숙을 했다. 하숙집 주인이었던 캐서린 아주머니는 커피를 좋아했다. 수영풀이 있는 야외에 커피메이커를 가져다 놓았다.
내가 일찍 일어나 토스트라도 구우면 백발의 백인 아주머니가 웃으며 조용히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굿모닝 스티브~찬장 위에서 폴저스 좀 꺼내줄래?”
“응? 그게 뭐예요?”
“커피, 저 깡통, 폴저스!”
Folgers라고 적힌 커다란 깡통이 있었다. 열어보니 안에는 곱게 갈린 커피가루가 한가득이다. 아주머니는 큰 스푼으로 커피가루를 듬뿍 덜어냈다. 커피메이커에 넣고는 스위치를 누른다.
“꾸룩꾸룩, 쉬이~~~“
하며 물이 데워지고 물방울들이 위에서 내려와 커피가루를 적시면서 아래 유리서버에 커피가 내려진다. 다 내려진 커피서버 바닥에는 늘 뜨끈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 말고도 몇이 더 있던 터라 커피는 늘 채워져 있었다.
나는 해질 무렵 수영장 앞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곤 했다. 샌디에고의 낮은 덥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해가 지고 나면 습기가 없어서 금방 시원해졌다. 노을이 지던 하늘과 바로 앞 수영풀을 볼 때마다 새삼 내가 다른 세상에 있음을 실감했다.
커피를 음미하며 군대에 있던 친구들에게 엽서를 적었다. 샌디에고 해변에 갔다가 나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른 것들이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건강미 넘치는 여성들이 서핑 보드 옆에 서 있다.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 얘기를 한다. 전방 초소에서 엽서를 받고는 화들짝 놀람과 동시에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 말이다.
한편, 다니던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근처에는 커피 전문점이 있었다. 간판이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그림이었다. 녹색의 여자가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기르고 왕관을 쓰고 있었다. 마치 메두사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바로 “스타벅스”였다. 학교에서 알게 된 한국인 친구들과 그 카페를 가끔 이용하면서 하나같이 했던 말이 있다.
“이거 한국에 가져가서 런칭하면 돈 좀 벌 것 같은데…”
그 스타벅스는 1999년에 국내 1호점을 런칭했다.
이런 얘기를 하니 직장 선배가 한마디 한다.
“내가 강남에 사지 않은 땅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
복학을 했더니 미국에서 마시던 커피 생각이 가끔 났다. 스벅이 오픈하자마자 대히트를 친 것은 아니었다.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셔보지 않았던 커피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커피 프랜차이즈는 그 이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현재 메가커피의 매장수가 스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만큼 커피는 우리들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 역시 프랜차이즈 커피를 애용한다. 미국 로스쿨에 유학을 다녀와서는 한동안 스벅과 커피빈을 자주 다녔다. 내 입맛에는 여기 커피가 잘 맞기도 했지만. 매장이 널찍해서 혼자 조용히 작업하기도 좋았다. 내부 인테리어가 미국에서의 추억을 느끼기에도 그만이었다.
문제는 내 입이었다. 간사한 내 입맛이 뭐 좀 없나?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수영풀 옆에서 마시던 폴저스는 인스턴트 커피와 다를 게 없는 똑같은 맛이었다. 아로마가 입혀진 가공된 맛의 커피였고, 유효기간도 지나치게 길어서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스벅커피도 “파이크”와 “베란다”라는 원두를 고를 수 있지만 결국은 같은 맛의 커피에 내 취향을 맞추는 셈이다.
커피에 대한 내 취향과 개성을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초에는 커피 바리스타 학원을 다녔고, 유럽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남들 앞에서는 남달라 보이는 스펙이긴 하지만, 바리스타 학원에서 생산지별 커피 원두의 미묘한 특성이나 그레이딩에 대하여까지 직접 시음하며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커핑이라고 들어보았는지? Coffee Cupping이란 커피를 감별해 보는 시음을 말한다.
마침 기회가 생겼다. 단골점인 명동성당 “커피 리브레”에서 퍼블릭 커핑을 개최했다. 휴가를 내고 어제 처음으로 달려가봤다. 커피 6잔을 바리스타가 드립으로 내려놓고 미리 예약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 포함 4명이다. 다들 젊은 친구들이다. 여자 하나 남자 둘이 먼저 와서 진지한 표정으로 커핑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깔을 보면 모두 중약배전으로 로스팅한 커피들이다. 즉, 스벅처럼 짙은 빛깔이 나도록 오래 볶은 커피가 아니라는 거다. 커피를 스푼으로 작은 잔에 담아 향과 맛을 음미하고, 나눠준 종이에 각자 메모한다. 한 바퀴 돌면 관심이 가거나 맛있었던 커피를 몇 번이고 더 맛본다. 커피가 식어가며, 또 처음 맛볼 때와는 다른 맛과 향을 느끼며 내 메모가 더 풍성해진다. 바리스타는 옆에서 우리들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준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시음이 다 끝나가자,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기가 맛있게 마셨던 커피에 대하여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첫 참석자가 말하기 시작한다.
“제가 가장 맛있게 마신 커피는 가운데 아래에 있던 이 커피였습니다. 지난번 커핑 때는 같은 원두가 꿉꿉한 느낌이 있었어요. 목 넘김도 좋지 않았고요, 그런데 오늘 나온 같은 커피는 산미가 충분히 임팩트 있지만 너무 과하지 않고, 자두 같은 과일향도 느껴졌어요. 다크 초콜릿 맛이 캐러멜 느낌과 어우러져서 아주 깔끔하게 넘어가네요. 클린 컵 관점에서도 베스트였고, 식어도 맛이 가장 괜찮았어요.”
‘헉, 큰일이다. 한국말이긴 한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차례가 왔다. 내 입에서는 평가가 아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다들 뭐 하시는 분들이에요? “
알고 보니 전문 바리스타 들이란다.
“저는 스벅커피 이용하다 요즘 들어 스페셜티 커피를 알아가는 직장인입니다. 저는 에티오피아 커피를 좋아해서 그런지 저 커피가 구수하고 향이 복합적이면서 산미도 많이 느껴져 좋았어요. 여러분들에 비하면 정말 어휘력이 부족하네요. 자주 와서 배우고 내공을 쌓아야겠습니다.“
내 대답에 옆에 있던 키 크고 잘 생긴 친구가 한마디 한다.
“직장 다니는 아마추어 애호가 분이 이렇게 나오시는 건 처음 봤어요. 너무 멋진 것 같아요.“
하… 잘생긴 친구가 말도 이쁘게 하네. 부하직원이었으면 잘해줬을 텐데…
다음 커핑 때 만나면 커피 한잔 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