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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Dec 12. 2022

재벌집 막내아들과 능력주의라는 착각

그리고 진양철의 기업가 정신에 대하여

본방사수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하고 있다. 바로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강력히 의심하는 점이 있다. 11회에서 "순양그룹" 창립자 진양철 회장을 상대로 차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 누구일까? 장손 진성준, 며느리 모현민 ?


아니다.


이 드라마의 PD와 작가가 내 또래라는 점을 강력히 의심하고 있다. 40대라면 공감할 만한 소재가 깨알같이 살아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 과거로 돌아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으니, 일단 즐겁다. 청춘과 오버랩되는 씬 스틸러들이 많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나 싸이의 데뷔 등. 아내와 함께 "아... 맞아, 저 때 그랬지"하는 반가운 탄성의 연속이다.


높은 시청률의 키는 일단 연기다.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한 몫하고 있다. 언제 봐도 잘생기고 번듯한 송중기다. 순양에서 철저히 머슴 같은 "을"로 살다 죽임을 당하고 순양가 재벌 3세로 환생한 진도준역을 한다. 그의 인생 2회 차를 보며 대리 만족을 하고 응원도 하게 된다. 조연들의 연기도 탄탄하다.


특히나 고명딸 진화영으로 나오는 김신록의 과장스러운 화장과 연기가 압권이다. "지옥"에서 존재감을 내뿜었던 박정자가 이렇게 욕망의 화신으로 완전히 변신하다니! 장자승계는 따놓은 당상이었으나 송중기 때문에 물먹고 있는 큰 손주 진성준역의 김남희가 펼치는 반격도 쫄깃하다.


무엇보다도 이성민이 맡은 진양철 회장 연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말 시상식은 이성민에 대한 오마주로 대미를 장식할 것만 같다. 그는 눈빛 연기만으로, 기업과 돈에 대한 재벌사주의 진심을 보여준다. 자신의 기업 "순양"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라고 가족들 앞에서 일갈하면서...

진화영 역의 김신록

좀 더 드라마 안으로 들어가 보면, 자금 우리 사회가 열망하는 능력주의에 대한 선호가 투영되어 있다. 능력주의는 한마디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운동장이라는 게임의 룰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경쟁하고 각자의 능력대로 대우받자는 것이다. 그러니 능력을 벗어난 대우는 차별이다. 재벌가의 가족 승계구도에서 아들이나 손자가 물려받는 구조는 능력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창업주의 후손이라고해서 창업주의 DNA를 자동으로 물려받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근거리에서 창업주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고뇌, 과단성, 실패, 책임감 등의 여러 실제를 보고 배워 2세, 3세가 더욱 담금질되고 성공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드라마 안에서 기존의 2세, 3세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반대로 갑툭튀 진도준은 애초 승계구도에서 제껴져있다. 그가 순양을 물려받을 수 았는 방법은 하나다. 오롯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순양을 사들이는 것이다. 을의 반란은 당연히 쉽지 않다. 이에 을의 심정을 아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진도준을 응원하게 된다.


한꺼풀 뒤집어 보면 송중기가 열연 중인 진도준도 능력주의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는 환생 전 윤현우 팀장일 때, 창업자 진양철의 자서전을 외울 정도로 읽었다. 순양의 역사를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환생하여 인생 2회 차를 살면서, IMF 경제위기, 새롬기술과 같은 닷컴 버블, 아마존 주가의 천문학적 상승과 같은 예견할 수 없는 사건을 이미 다 알고 있다. 당첨번호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로또를 사는 것이다. 그의 능력이 진짜 능력이 아닌 이유다.


하물며 창업자의 2세, 3세라는 피의 능력도 미래를 읽는 송중기의 능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것이 투자기회의 확보와 수익의 창출이라는 자본주의 기업 현장에서 발휘되고 즉시 숫자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벌가의 기득권 세력일지라도 진도준 앞에서 게임의 룰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재벌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우리 “을”들은 진도준이라는 을의 반란이 통쾌하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죽기 전의 윤현우 팀장이라는 "을"과 재벌 3세로서의 진도준이라는 "을"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나 덧붙이자면 남자들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송중기의 외모와 목소리는 착시효과를 더한다.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이 말한 "능력주의의 함정 혹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평평한 운동장이라는 것은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만큼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은 여전히 등장한다. 진양철 회장은 죽을 수도 있는 대형 교통사고를 겪는다. 그런데도 자기가 살아난 것은 순양자동차의 안전성을 입증해주는 사건아니냐며 웃는다. 기승전 순양인 진양철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사실 살짝 숙연해졌다.


진양철에게서 작고한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 회장이나 그의 아들 이건희 회장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우리 경제성장에 있어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었다. (그들에 대한 평가나 명암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기업가 정신이 무엇이냐고? 기업가 정신은 entrepreneurship이라고 한다. 불어에서 온 말이다. 발음하기 쉽지 않다. "안~트어프리뉴어쉽"이라고 읽는다. 기업가는 뒤에 쉽을 뺀 "안~트어프리뉴어(entrepreneur)"다. 장사나 사업을 꾸리는 비즈니스맨 하고는 다른 의미이다.


조셉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슘페터는 새로운 생산방법과 새로운 상품개발을 기술혁신으로 규정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기업가를 혁신자로 보았다.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기업을 영위한다면 기업가 정신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을 비교적 최근의 혁신적인 기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의 창업주들인 삼성의 이병철, 현대의 정주영을 혁신적인 기업가라고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이들 우리 경제가 저성장, 저출산, 저임금의 3저에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1997년 IMF 사태 후 기업가 정신의 불꽃은 갈수록 사그라들고 있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새로운 기업들이 출현하긴 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을 빼면? 코인 업체들과 기업가 정신을 같이 놓는 것은 낯간지럽다. 냉철한 현실분석을 바탕으로 모험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기업인이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실패의 교훈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삼성과 현대의 창업주들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


나는 “수십년 전의 진양철”을 보면서 여전히 우리가 기업가 정신에 목마르다는 “현재”를 본다. 삼성의 현재 경쟁사는 애플이다. 그러나 "순양시절" 전자하면 일본이었다. 삼성이 긴 시간 소니를 추격하는 방식으로 생존해왔음을 잊었거나 모르는 이가 많다. 그리고 그 소니는 넘사벽이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웃음이 있었다.


월드컵 16강 진출이 꿈이 아니라 실제가 된 것을 포함해 많은 일들이 사실 수십년 전에는 그저 꿈이었다. 기업가 정신이 활활 불타올랐던 진양철들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새삼 뉴페이스가 목마르다. 여기저기서 더욱 많은 진양철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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