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25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에서 내려오다 보니, 분리수거 장면을 여럿 보게 된다. 분리수거를 하는 날은 일주일에 두 번이다. 가족이 산다면 보통 분리수거는 남자들의 몫이다. 남편이자 아빠들이 한다.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쓰레기를 페트병, 플라스틱, 종이, 캔, 병 등등으로 이미 분리해서 캠핑 때 쓰는 카트에 차곡차곡 담아 우아하게 끌고 내려오는 남자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쓰레기도 쓰레기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분리수거의 프로페셔널이다. "내가 분리수거 경력만 몇 년째인 줄 알아 이것들아?" 하는 것만 같다.
쓰레빠를 끌고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아저씨도 있다. 양손에는 쓰레기를 담은 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한쪽 봉지에서는 알 수 없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인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뭘까?' 의문을 자아내는 이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뛰어 나간다. 그러고는 쓰레기를 여기저기 바쁘게 던져 놓는다. 어느 페트병은 수거함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다.
'사과 껍데기 스티로폼은 더 이상 분리수거 대상이 아닌데...'
그는 모르는지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스티로폼 박스 위에 껍데기 스티로폼 들을 휘익 던져놓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얼굴에는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끝낸 아이의 후련함이 묻어있다. 멀리 가지 않았다. 근처 벤치에 앉아 한쪽 다리를 덜덜 떨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런데
정작 너는?
용가리 통뼈야? 분리수거를 아예 안 한다고?
갑자기 여성들의 삐딱한 시선이 나에게 따갑게 꽂히는 것만 같다.
우리 집 쓰레기 분리수거는 아내가 한다.
우리 집이 꼭대기 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쓰레기를 싣고 내려가는 아내를 보고, 보다 못한 이웃들이 한마디 했나 보다.
"남편 분이... 음... 바쁘신가 봐요? 아내 분이 항상 분리수거를 하시고... 거 참"
아내는 대꾸한다.
"네... 바빠요. 남편은 지금 집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앗? 네..."
나는 분리수거를 안 하는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아내와 타협한 것이기도 하다. 아내는 요리를 싫어한다.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며, 불만이 많았다. 어른들은 "요리는 감이여"라던데, 아내는 그 "감"이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해보기로 했다.
유튜브는 요리를 배우기에 너무나 좋은 도구다. 얼마나 다양한 레시피들이 있는가? 요리책에 비해 따라 하기도 훨씬 쉽다. 유투버 중에 원 탑은 백종원이다. "어때유? 참 쉽지유?"하는 그다. 나 같은 초보에게는 딱이다. 신기하게도 따라 하기만 하면 얼추 맛이 난다. 성시경의 "먹을 텐데"가 요즘 인기가 많은데, 그가 요리하는 것을 흉내 내 보기도 한다. "뚝딱이 형의 1분 레시피"는 잼민이가 멘트를 날리는 장면이 재밌기도 하지만 레시피로서도 유용하다.
내 첫 메뉴는 소고기 미역국이었다. 아내의 생일상을 한번 차려주고 싶었다. 여러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잘 끓인다. 자른 미역을 물에 불리고, 조물조물 빤다. 그러면 미역의 비린 맛을 없애준다. 한우 소고기 양지를 준비한다. 싸지는 않다. 그냥 국거리 소고기를 써도 되지만 여러 번 끓여보니 역시 양지를 쓰는 게 제일 낫다. 나는 여유 있게 300그램 정도를 산다. 참기름에 핏물을 제거한 자른 소고기를 들들 볶다가 불린 미역, 마늘 한 스푼, 간장 3숟가락을 넣는다. 미역을 오래 볶을 필요는 없다. 적당히 볶다가 냄비 가득 물을 붓고, 한번 끓으면 참치액젓을 2숟가락 정도 넣는다. 감칠맛이 확 살아난다. 40분 정도 끓인다. 간은 소금으로 하고 후추를 투하하면 끝. 세상 편하다. 한번 끓이면 이틀은 먹는다.
최근에는 "육식맨"의 라구 소스 만들기를 따라해 봤다. 지인 가족을 불러 3시간을 끓인 라구 소스(라구는 오래 끓였다는 이태리말이다)에 굵은 리가토니 파스타를 버무려 샐러드와 함께 내놓았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도 그레이터에 갈아 솔솔 뿌렸다. 파스타만 먹으면 아쉽다.
"소금집"에서 산 잠봉과 에쉬레 버터를 동네 프랑스 불랑제리의 유기농 바게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간편하게 "잠봉뵈르(Jambon Beurre)"가 되었다. 와인이 빠질 수 없다. 칠링한 소비뇽 블랑을 곁들였다. 다들 맛있다고 아우성이다. 응용도 어렵지 않다. 라자냐도 만들어 봤다. 맛있다.
얼마전 아내에게 물었다.
"나랑 결혼한 게 잘했다 싶은 때가 언제야?"
.
.
.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괜한 걸 물었다. 없나 보네?)
한참 뜸 들이던 아내는
"...요리해 줄 때?"라고 했다.
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노후대책에 연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리도 노후대책이 아닐까?
일단 집에 혼자 남아도 생존이 가능하다. 주야장천 라면만 끓여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빠가 요리를 해주면 제일 먼저 아내도 좋아하지만 아이들도 반긴다. 엄마가 해주는 메뉴가 그 밥에 그 나물이었는데, 변화가 있으니 좋아할 수밖에. 분리수거는 아무나 하는 것이지만 요리는 스킬이 필요하다. 스킬을 갖추면 아내에게 정리해고 당할 일은 없다.
그래도 분리수거는 해야 하지 않냐는 여성분들의 일침이 들리는 듯하다.
분리수거 보다는 신 메뉴를 개발하는걸 아내가 더 좋아할 것 같긴 한데, 고민해봐야 겠다.
기왕 분리수거 할거면 프로페셔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