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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Feb 11. 2023

과거시험도 컨닝을 했을까?

책: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압권"이라는 말이 있다. 누를 "압"에 책 "권"을 붙인 말인데,


"그 영화 마지막 반전 씬이 압권이야."

 

하듯이, 한마디로 끝내주는 것을 보고 압권이라고 묘사한다. 압권의 유래는 무엇일까?


바로 조선시대 과거 답안지다. 시험이 끝나면 1등인 장원을 차지한 답안을 임금이 편하게 읽어볼 수 있도록 다른 답안지보다 맨 위에 올려놓았다. 이때 장원의 답안지가 다른 답안지를 위에서 누르는 모양을 빗대어 압권이라고 한 것이다.


오천원권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아는가?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다. 그는 우리나라 공무원 시험 역사를 통틀어 "압권"이라 할 만하다.

그의 별칭이 있으니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다. 과거에 9번 응시해서 9번 수석 합격한 전무후무한 기록의 보유자인 것이다. 천원권의 "퇴계 이황"은 어떤가? 그 역시 이이에 못지 않은 대학자였음에도 과거에 응시한 지 10년만에 마칠 수 있었다.


현대 사법시험이 고시 낭인을 양산하여 그 폐해를 고치려고 도입된 것이 로스쿨이지만 요즘은 변시낭인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문제가 없었을 까? 아니다. 더하면 더했지 지금보다 그 열기와 폐해가 못지 않았다.


먼저 응시 자격이다. 양인 혹은 평민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이는 그림의 떡이었다. 소과를 합격해야 대과를 보고, 고위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소과는 사학과 향교 출신, 하급 관리들이 응시가 가능했고, 대과는 소과에 합격한 생원, 진사, 성균관 유생, 정 3품 당하관 이하 공무원의 응시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과거 준비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조선 문신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에는 애초에 논 9마지기(1마지기는 2-300평 정도의 크기다), 밭 90 마지기를 물려받았으나, 10년간 과거를 치면서 불과 논 5 마지기, 밭 8 마지기만 남았다는 고백이 나온다.


대치동 일타강사의 고액과외도 있었다. 당시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유생들 조차 사교육을 따로 받았다.  


"선생이 자주 바뀌어 성균관 유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 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가르치는 일이 점점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학부모들은 성균관에서는 공부가 안된다고 해서 집에서 잘 가르치는 개인 선생에게 과외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1527년 중종 22년, 김극핍의 보고서


과거는 온 가족 등골이 휘는 일이었지만,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신분 사회에서 계급이 상승하거나, 지금의 지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합격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록상 조선 시대 최고령 합격자는 90세이며, 80이 넘어 합격한 이도 여럿 된다. 그 나이에 급제하여 무엇을 하겠는가? 시험합격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인생들이었다.


과거시험에는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방법을 논하여라(세종), 징벌이냐 화친이냐? (선조)"와 같은 예상문제가 나오기도 했지만, 판에 박힌 문제만 출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출제자가 낭만을 아는 경우도 있었다. 아래 문제는 그래서 놀랍다.


"섣달 그믐날, 그 쓸쓸함에 대하여 논하라." 1616년 광해군 8년.




과거 시험에는 온갖 부정행위가 속출했다.


무엇보다 아빠 찬스가 있었다.  아들의 시험에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가 부정 개입한 것이다. 어느 당상관은 아들이 응시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버젓이 시험관으로 나갔다. 어느 관료 아버지는 답안지를 자신이 돌려받아 내용을 수정하고, 제출자를 알아볼 수 있게 표시도 한 사실이 나중에 적발되어 처벌을 받았다.


부정행위는 아빠 찬스로만 끝나지 않았다. 팀을 꾸려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팀은 3명 이상이 한조가 되었고, 각자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선접꾼"은 앞자리를 차지하고자 시험장 문이 열리면 미친 듯이 오픈런을 했다. 문제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맨 앞에 문제를 걸어놓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잘 보이는 자리를 선점하려는 테크닉이었다. 33명의 최종합격자를 뽑는 과거시험에서 응시자는 수만 명이었고, 나중에 제출된 답안지는 채점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먼저 제출하는 것이 유리했다. 시험은 시작부터 선접꾼들의 달리기 경쟁으로 부작용도 많아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생기는 아수라장이었다. 선접꾼이 자리를 차지하면, 뒤따라 "거벽"과 "사수"가 등장했다. 거벽은 족집게 과외선생이어서 문제를 보고 답을 알려주는 대리응시자였다. 사수는 거벽의 말을 받아 글씨만 예쁘게 쓰는 필체 전문가였다. 환상의 팀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관대작의 아들이나 돈 많은 응시생들은 팀만 잘 꾸리면 정작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실기 시험이라고 해서 공정하지도 않았다. 무과 응시생들이 치르는 무술시험에서도 부정행위는 속출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쏘기 시험을 볼 때, 한 수험생은 첫 표적이 맞지 아니하였는데도, 관원은 맞았다고 북을 쳤습니다. 또 다른 수험생은 아직 4개 표적까지 활을 쏘지도 않았는데, 관원이 5발 중 4발이 적중했다고 소리쳤습니다." 1492년 성종 23년


기상천외한 컨닝도 많았다. 남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가 하면, 붓두껍에 답안을 숨긴 사람도 있었다. 손톱에 몰래 정보를 새기는 응시자도 있었고, 부채를 만들어 컨닝페이퍼로 쓰기도 했다. 심지어 콧구멍에 답안을 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장의 혼란은 극에 다다른다. 성균관 이형하가 부정행위를 정리한 "과거팔폐"를 올렸다.


"남이 대신 글을 짓고 대신 써주며, 시중드는 하인이 책을 가지고 시험장에 마구 따라 들어가고, 시험장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며, 미리 써놓은 답안지로 바뀌치기 하고, 시험장 밖에서 답안지를 써서 들어가며, 시험장에서 문제를 미리 누설하고, 경비하는 관리가 바꾸어 가면서 시험장에 들어가 답을 알려주며, 답안지를 마음대로 바꾸고 농간을 부립니다." 1818년 순조 18년.


정약용은 이런 과거시험이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는 시험으로 전락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과거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과거는 이미 쇠진했다." 오학론, 정약용


책,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과거 시험의 역사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어 일독할 만 하지만, 덮고 나면 지금의 실정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참으로 씁쓸하다. 말했듯이 아빠 찬스의 유구한 역사를 재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로만 끝나지 않는다. 대관절 어느 기업이 대리급 직원에게 퇴직금으로 50억을 준단 말인가? 아빠 찬스 없이 이게 가당키나 한가? 선접꾼으로 시작하는 팀플의 역사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이자 공모 범죄다. 그런데도 성찰과 반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요원하다. 며칠전 표창장 위조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일가의 당사자는 커밍아웃을 하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했다.


큰 아이가 고3이 된다. 수험생 부모로서 걱정이 많다. 아이가 원하는 학교와 학과는 정시 위주라서 수능을 준비하고 있고, 미대 지망생이라 대치동에 위치한 전문 미술학원도 다녀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요즘은 방학 특강이라고 해서 하루종일 학원에 있다 온다. 나는 우리 아이가 나중에 거액의 퇴직금을 받게 도와줄 수도 없고, 아이에게 특별한 스펙을 만들어 줄 인맥도 없으며, 혹 있다한들 이를 실행할 용기도 없다. 해줄 수 있는 건 학원 라이딩 정도고, 종종 화이팅!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이다.


정약용의 탄식이 그저 탄식으로 끝나지 않게, 혼탁함을 정화할 변화의 바람이 제대로 불었으면 좋겠다. 해줄 수 있는게 별로 없는 능력 없는 아비지만 부끄럽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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