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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Apr 03. 2023

아빠와 아들의 2박 3일-후쿠오카

호준에게


몇 달 전이었지. 네가 방과 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혼자 다녀온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들었어. 우리 집에서 동대문은 시골 할머니 댁에 가는 것만큼 멀잖아. 너는 "너의 이름은"이라는 일본 애니의 극장판을 보러 갔지.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또 보러 간다고?' 아빠는 사실 처음 들어봤어. 그 애니도 "신카이 마코토"라는 감독도 말이야.


얼마전부터 최신 애니 "스즈메의 문단속"이 상영을 시작했지. 너는 누나하고 먼저 보더니, 아빠 엄마하고도 한번 더 봤지.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게임 말고도 있다는 게 우선 반가웠어. 아빠도 이 애니 좋더라. 전달하려는 내용도 작화도 다 마음에 들었어. 애니의 배경을 보니 일본의 규슈 지방이더라고.


아빠는 세심함은 부족하지만, 실행력은 좋은 편이잖아. 곧바로 규슈의 후쿠오카 여행을 알아봤어. 여행의 이유는 하나 더 있었어. 고3인 누나도 중3 때 아빠하고 오사카를 다녀왔잖아. 그러니 이번에는 네 차례.


일정은 3월 말이어야 했어. 일본은 벚꽃이 유명하잖아. 후쿠오카의 벚꽃을 보기에는 지금이 제일이지.

후쿠오카 성터 2023-3-30 18:30

해외 출장 다닐 때는 출장 일정 짜느라 야근하는 게 힘들었는데, 너하고 가는 여행 일정은 고민을 거듭해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후쿠오카는 나 역시 처음 가보는 곳이고, 코로나 이후 첫 해외 여행이라서 기대도 되더라.


그런데 짧은 일정 안에 너한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맛보게 해주려던 아빠의 계획은 욕심이었어. 평발인 네가 아빠하고 똑같이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첫날 새벽부터 출발해서 우리 2만 보는 족히 걸었지? 저녁이 되자 아픈 발 때문에 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더라고. 많이 미안했다.


가족여행이 사실 매 시간 즐겁기만 하지는 않아. 지지고 볶을 때가 있는 게 가족이니까. 아빠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정작 너는 관심은 1도 없어 보였어. 또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너를 보며 아빠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 스마트폰은 너의 세대에게는 그냥 몸의 일부인 것 같아. 잠깐 한눈팔다가 너를 보면 넌 어김없이 폰을 보고 있어.


버스에서 졸다 깨어보니 역시나 게임 중. 체스 게임 중인게 위안?

아빠는 이윽고 삐쳤어.


'여행이 다 무슨 소용이람. 어디 들어가서 각자 폰이나 보자.' 싶더라고. 카페에 들어갔어. 나도 아이패드를 꺼내서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지. 읽다가 말았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어. 소설의 주인공은 중학생 "동호"야. 광주의 평범한 중3이자 막내였던, 너와 동갑내기 동호.


80년 광주의 5.18 민주화 운동을 들어봤지? 동호는 그때 상무관이라는 곳에서 시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돕게 돼. 그러다 계엄군에 의해 동호도 무참히 희생되어 버려. 동호는 문재학 열사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했단다.


책을 읽기 시작하니 몰입이 되는데,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그 처참함과 뒤이은 슬픔을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단다. 작가 한강도 인터뷰에서 그랬어. 고작 세줄 쓰고 한 시간을 우는 시간이 반복되었다고. 소설 후반에 죽은 동호를 꿈에서 만난 어머니의 독백이 나와.

그 머시매를 따라갔다이. 요새 어느 중학생이 그리 짧게 머리를 깎겄냐이. 동그스름한 네 두상을 내가 아는디, 분명히 너였다이.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락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 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알 수 없다이.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 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소년이 온다" 중

책에서 눈을 들어 너를 바라봤어. 폰에 열중하고 있는 너의 얼굴을 뚫어져라 잠시 봤지. 내 아들 호준이가 내 앞에 있었어. 내 몸 어디선가 통증 같은 게 올라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 왜였는지도 모르겠고. 내 입에서는 깊은 탄식이 나왔어. 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지. 네가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 네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다시 일어서야 했어. 시간은 어김없이 가고, 돌아갈 시간은 다가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카타 역 서점을 들렀지. 거기서 아빠는 드디어 찾았어. 오기 전에는 후쿠오카에 "스즈메의 문단속" 기념품들이 넘쳐날 것으로 생각했거든? 근데 막상 와보니 하나도 없더라고. 낙담하던 와중에 서점 직원에게 물어봤지. "스즈메의 문단속"과 관련한 책이 있을까요?


여자 직원은 검색해보더니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갔어.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왔지.

영화 제작기가 담긴 고퀄의 책이었어.

너에게 안성맞춤인 기념품이었던 것 같아 기뻤어.


마지막 날이 되니까 네가 그랬지.


"아빠, 죽도록 걸었더니 평발도 적응이 되었나 봐. 이제는 생각보다 많이 안 아프다."

벳푸의 거리를 걷는 아들

다행이야. 아빠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프더라도 조금만 아팠으면 좋겠어.


아빠가 길을 잃고 헤멜 때 네가 그러더라.

"아빠, 방금 지난 에스컬레이터가 캐널 시티로 가잖아"

"어? 그래?"

네가 있어서 든든한 2박 3일 이었어.


야경을 보러 탄 리버 크루즈에서는 아빠가 다른 데를 보는 사이 넌 조용히 동영상을 촬영하더라고.

그래. 너도 네 방식대로 세상을 보고, 즐기고, 알아가고 있는 거 였어.

 

호준아, 곁에 있어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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