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은 거스를 수 없으니까요.
아빠가 외도를 하셨든 안 하셨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말든
아빠는 법적으로 여전히 나의 아빠셨죠.
엄마와 아빠가 자식들 앞에서 몸싸움까지 하셨다는 건 일이 이미 커질 만큼 커진 상태였던 거겠죠.
엄마는 그 사실을 아시고도 몸져누우실 상황이 아니셨어요.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를 부여잡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삶의 전선으로 나가셔야 했고 아빠는 여전히 백수놀이에 빠져계셨죠.
엄마와 우리에게 들키기까지 했지만 아빠의 태도에서는 미안함이나 반성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 무렵 나는 어렸기에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냥 집이 너무 싫었어요.
집에서는 더 이상 웃을 일도 없었고 평안함도 없었어요.
당시 큰언니는 이미 결혼을 해서 독립을 한 상태였고, 나머지 언니 오빠들도 취직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었어요.
물론 바깥일이 바쁘기도 했겠지만, 그것보다는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죠.
저도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10시 넘어 집에 갔기 때문에 우리가 집에 없는 시간에 엄마 아빠가 더 격렬한 싸움을 하셨는지 아님 관계가 좋아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다만 그 시절 저는 우울한 시간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발견한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편지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왜 울고 있었던 거야? '
하는 구절을 봤어요.
또 그즈음 둘째 언니가 결혼을 준비 중이었는데, 언니의 편지 중에도 그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미안하다. 너만 이곳에 두고 가서..'
행복하지 못한 곳에 나만 두고 가는 미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구절이었죠.
그 시절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행복하셨을까요?
외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랑 혼인 관계를 계속 이어가셨죠.
우리보다 좀 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큰언니가 엄마보고 당장 이혼하시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반대하셨죠.
그 시절엔 이혼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판단하셨던 엄마는 우리가 결혼할 때 ‘이혼 가정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고 싶지 않으셨다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다 결혼시킨 후에 이혼하실 거라고 보류 아닌 보류를 하셨어요.
엄마가 아빠를 받아들이고 사시기로 결정하셨으니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었죠.
아빠랑 같은 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속으로는 한없이 아빠를 미워하고 경멸했던 걸 아빠는 상상이나 하셨을까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10년을 더 살고 저도 결혼을 했지요.
하지만 엄마는 이혼 얘기는 꺼내지도 않으셨어요.
어쩌면 엄마는 처음부터 이혼하실 마음이 없으셨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자식 낳고 살아보니 이혼을 결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남편과 20년의 결혼 생활 중에 저에게도 왜 위기가 없었겠어요.
죽이고 싶게 미운 적도 있었죠.
그런데 자식들 보며 참았어요.
창피한 말이지만, 사실은 저 혼자 힘으로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남편에게 생겼던 부정적인 감정을 고이고이 접어 잘 봉인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아예 없어지진 않더라고요.
한 번씩 남편이 잘못했던 행동이 떠올라 치를 떨기도 하지만, 남편이 노력하는 모습에 미워했던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네요.
갑자기 아빠에게 묻고 싶네요.
아빠, 만약 내 남편이 바람을 폈다면 아빠는 그를 용서할 수 있나요?
당신과 같은 일을 저질렀으니 이해가 됐을까요?
아님 나 대신 그를 흠씬 패주기라도 했을까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가 있거든요.
거기에 신구 배우가 맡은 역할을 보면서 자꾸 아빠가 겹쳐졌어요.
고집스럽고 꼬장꼬장하고 이기적인 아빠.
그런데 그 아빠가 나중에 자기 딸을 위해 싸워줄 때, 우리 아빠라면 과연 그러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드라마에서 아빠를 미워하던 딸을 보며 나도 어쩌면 아빠를 오해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여전히 이기적인 분이라, 안 그러셨을 것 같긴 한데..
아빠는 어떤 분이실지 궁금하네요.
난 아빠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거든요.
얼굴 맞대고 눈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얘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미워만 해서 아빠를 알아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어요.
이젠 그런 것들이 후회되네요.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가 이제서야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