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벌기 싫지만 돈에 집착하는 아빠
아빠가 나의 아빠가 아니었다면
내가 제삼자로서 아빠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면, 아빠도 참 애처로운 사람이에요.
부유한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나서 경제적으론 부족함 없는 유년 생활을 보내셨죠.
하지만 돈의 가치나 경제적인 개념을 배우지 못한 부유한 사람은 오히려 잔인하리만큼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죠.
아빠 덕분에 가난한 시절을 보낸 우리 다섯 남매는 하나같이 생활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들이 되었고, 돈이 무서운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그런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분이라 돈이란 게 얼마나 사람을 처참하게 만드는지, 또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지 잘 모르셨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부모가 이뤄놓은 재력에 기대어 사시다가 결혼 하시고선 사업 좀 해보시겠다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시다가 다 망하시고 그 덕에 엄마가 서울로 장사를 다니셨죠.
다섯 자식들은 아빠에겐 긁지 않은 복권이었죠.
아빠는 자식들이 빨리 크기를 간절히 바라셨죠.
그래야 그 자식들이 나가서 돈을 벌어올 테니까요.
큰언니는 우리 중에 머리가 제일 좋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언니가 우리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언니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부모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자랐다면 언니는 정말 뭐라도 했을 사람이에요.
아빠는 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고 버스 안내양이 되라고 하셨다죠.
언니는 공부도 잘했고 좋아해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안내양이 됐어야 했지만, 멀미가 심한 탓에 하루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그 소식을 아빠에게 전하자 아빠는 엄청나게 화를 내시며 다른 집 딸은 잘만 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며 역정을 내셨다죠.
아빠는 그런 일들을 기억이나 하실까요.
기억이란 게 참 우스워요.
같은 일을 겪어도 자기 반의 방식으로 덧칠을 해서 미화하여 기억하기도 하고 더 나쁘게 기억하기도 하니까요.
언니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날의 공기와 아빠의 표정과 말투를 아빠는 기억이나 하실까요.
저에게도 아픈 기억이 하나 있어요.
물론 하나는 아니지만, 그중 아직도 말로 표현하려면 아픈 기억 말이죠.
학원 강사로 일하던 저는 보통 퇴근 시간이 11시 정도였는데, 그 겨울은 참 추웠어요.
학원에서 난방이라고 해봤자, 공기가 훈훈해질 정도는 아니고 난방기계 가까이 있는 친구들만 따뜻할 정도였는데 저는 그 난방기를 학생들에게 양보하고 수업을 했으니 몇 시간 동안 온기가 없이 차가운 몸을 이끌고 퇴근하고 집에 가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보일러 스위치가 안방에 있었으니 보일러를 켜려면 안방문을 열 수밖에 없었어요.
아빠는 이불을 목까지 뒤집어쓰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아빠가 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보일러를 켜자마자 아빠는 몰래 도둑질하는 놈을 잡으려고 기다린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더워 죽겠는데 보일러를 왜 켜냐!!!"
저는 너무 깜짝 놀라 도망치듯 안방을 빠져나와서 제 방으로 간 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왜 밖에서 떨고 일하고 온 자식에게 수고했다 말 대신에 보일러 켠 일로 그렇게 화를 내셨나요.
아빠는 일하시기는 싫으시니 그런 부분에서 돈을 끔찍이 아끼셨어요.
아빠의 지인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양 내는 술값이나, 본인 꾸밈비에는 돈을 안 아끼셨죠.
덕분에 엄마랑 아빠가 같이 외출 준비를 하시면 둘이 정말 부부가 맞을까 싶게 어쩐지 안 어울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빠는 유독 열이 많기도 하셨죠.
어릴 때부터 몸에 좋은 거란 좋은 건 다 드시고 엄마랑 결혼하신 후에는 엄마는 아빠가 '끙' 앓는 소리 한 번이면 보신탕을 갖다 바치셨으니까요.
여름이고 겨울이고 들쩍지근한 들깻가루 냄새가 온 집을 가득 채웠죠.
그렇게 보양을 하시고 돈 벌러 일을 나가신 것도 아니고 엄마에게 애정을 채워주신 것도 아니고, 엄한 곳에 가서 재미를 보셨는데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그걸 그렇게 끓여다 바치셨을까요?
엄마에게 아빠의 존재란 뭘까요?
신혼 때 아빠랑 싸우고 친정에 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죽어도 거기서 죽으라며 엄마를 내치셨다고 하셨죠?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생존을 위해 아빠에게 잘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바람을 피우고 다니시고, 엄마에게 상처를 주시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를 끔찍이 사랑하셨을까요?
엄마에게 향하지 않은 시선을 그렇게라도 해서 받고 싶으셨을까요?
아니면 아빠가 불쌍했을까요?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바람피우고 다니는데도 왜 그렇게 잘해줬어? 아빠를 그렇게 사랑했어?"
에 대한 답변은
"사랑은 무슨 사랑. 그냥 그때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알았어."
그게 정말이라면 그때 그 시절이 참 잔인하네요.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서 뭐가 잘못된 건지 판단 능력 자체가 없던 시절..
남자가 바람피우는 게 당연하고, 바람 안 피는 남자에게 오히려 고마워하던 시절.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여자 탓을 하던 시절.
끔찍하게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