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과 게으름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 했던가요?
시골에서 다 망해먹은 사람이 서울에 올라왔다고 갑자기 변할까요?
서울은 오히려 아빠에게 놀거리가 더 많고 다양한 곳일 뿐이었죠.
강해진 건 엄마뿐이었어요.
가방끈 짧은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뚱이하나로 할 수 있는 일들 뿐이었죠.
그나마 서울에서 미리 자리를 잡으셨던 친척분의 도움으로 아빠는 막노동판에서 '야방' 자리에 들어가게 되셨죠.
엄마는 장사 다녀오신 후에 급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아빠만을 위한 반찬들을 준비하셨어요.
한 손에는 어린 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손은 반찬과 밥을 싼 찬합을 들고 아빠에게 가셨어요.
다른 언니 오빠들은 안 데려가고 오로지 나만 데려가셨기에 저에겐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어서 핑크빛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엄마에겐 고단한 하루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지치고 무거운 발걸음이었겠네요.
아빠의 도시락에는 우리의 밥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울 반찬들이 있었죠.
그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빨간 오뎅 볶음과 고기장조림이었죠.
우리의 밥상엔 김치찌개와 된장국을 일정한 간격으로 바꿔가며 올리셨는데 말이죠.
그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밥을 준비하시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저 같으면 "제발 이 밥 드시고 이젠 밥값 좀 하길 바래요." 할 텐데 천사표 우리 엄마는 그저 하루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몰라요.
아님 오늘까지만이라도 버텨줘요. 하는 마음도 있으셨을까요?
엄마가 아빠 반찬을 만드실 때 옆에 꼭 붙어있던 막내딸은 따끈따끈한 반찬을 몇 점 얻어먹을 수 있었어요.
얼마나 얼마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도 없고, 아무리 해보려 해도 그 맛을 흉내 낼 수가 없네요.
이제 연세가 많으신 엄마에게 그걸 다시 해 달라해도 엄마는 그게 무슨 맛인지 기억을 못 하신데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추억의 맛일 뿐입니다.
막노동 판에서 그나마 쉬운 일이라 웬만한 연줄 없으면 하기 힘들다는 그 야방 일도 며칠 못하고(또는 안 하고?) 그만두셨어요.
이유야 많았겠죠.
그 일도 그만두고 또 며칠을 노시다가 엄마를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분들의 도움으로 아빠는 다시 다른 막노동 판으로 들어가셨죠.
워낙 일머리도 없으시고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어요.
그 당시엔 지금처럼 안전 교육이나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발에 못을 찔리기도 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막노동일이라는 일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비가 오면 못하고 눈이 오면 못하고 공구리(콘그리트 작업이란말 인가 봐요) 치면 못하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허리를 비롯해 여기저기 돌아가며 통증을 느끼셔서 한 달에 일주일이나 일을 하셨을까요?
자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가고 아무리 김치찌개와 된장국만 끓여 밥을 먹어도 일곱 식구 식비만 해도 어마 어마했을 것 같아요.
그런 돈 걱정은 애초에 아빠 몫이 아니었죠.
우리가 커갈수록 엄마는 더욱 억척스러워지셨죠.
엄마의 머리 위에 올라진 다라이의 무게는 엄마의 몸무게를 이미 넘어섰을지도 모르겠네요.
버스에 그 무거운 다라이를 싣고 엄마는 오로지 자식새끼들 먹이실 욕심에 하루하루를 살아내셨지요.
40대 초반의 나이에, 지금의 제 나이보다 어린 엄마는 창피함이란 것도 느낄 여유가 없으셨겠죠.
때론 기사 아저씨들이 버스에 못 타게 하기도 하고 승객들이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겠죠.
엄마의 다라이의 무게가 늘고 장사수완이 늘고 손님이 많아질수록 아빠의 게으름의 무게도 함께 늘어났어요.
어느 날부터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아빠랑 아저씨들 몇 분이 우리 집에 모여서 화투를 치고 계셨어요.
대낮의 찬란한 햇살아래에서 담배연기가 가득한 방, 들큼한 막거리 냄새와 열무김치와 이런저런 김치들의 냄새의 조합.
어떤 날은 제가 하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도착 인사를 건네면 바로 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어요.
어렸지만 그 경험이 유쾌하지는 않았나 봐요.
집 앞에 다 와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방향을 틀어 죄 없는 실내화 주머니를 발로 툭툭 치며 집 근처를 뱅뱅 돌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런 게 당연한 건가 할 만큼 익숙해질 즈음에 어느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엄마가 친구와 저를 따스하게 맞이하시고, 호박이랑 야채를 넣고 부침개를 해주셨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지만 , 또 어쩐지 쓸쓸한 맛이기도 했네요.
난 집에서 기다려주는, 또 그렇게 따끈한 부침개를 나만을 위해 해 주는 엄마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게 저에게 아주 큰 구멍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 감정은 뭐랄까요.. 무언가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랄까요.
그때부터 난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집에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애들을 키우며 전 필사적으로 애들 하교 시간에 집에 있으려고 했고 또 그 시간에 맞춰 맛있는 간식을 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일 때문에 그 시간에 집을 있지 못했던 시절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안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고, 또 해줘도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요.
그렇게 그 일에 집착하며 아이들을 키워냈어요.
이제는 엄마의 손길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됐죠.
언제가 아이들이 오히려 엄마 없는 집도 나쁘지 않다. 혼자 있는 집도 좋다고 말을 할 때는 어쩐지 지금까지 나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리는 것 같아 허무함과 상대도 없는 배신감도 느꼈지요.
제가 아이들에게 쏟은 그 정성은 어린 시절 그토록 제가 받고 싶던 엄마의 사랑이자 지금도 채워지지 않은 나의 구멍인 걸 아이들은 모를 테죠.
내가 아빠를 미워한 두 번째 이유가 설명이 되었나요?
제 기억 속에 스틸 사진처럼 남아 있는 햇살 가득한 담배 연기 가득한 방.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엄마의 다라이.
아빠의 게으름과 뻔뻔함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