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예고치 않게 돌아가신 후에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난 오랜 기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가면 대부분의 대표기도나 설교 중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그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사람이,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지에 대해 들었다.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죽음도 결국은 그분의 때에 따라 그분이 부르시면 가야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죽음 앞에 얼마니 나약한지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겁이 많고, 불안 지수가 남들보다 높다.
그 원인은 어린 시절 양육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막내이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 나는 항상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나에게 ‘시도’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일들을 내가 “해줘~” 하면 주위에서 다들 해줬고, 때로는 해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도움의 손길이 먼저 다가왔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엄마도 불안 지수가 높은 탓일 것이다.
우리 엄마는 굉장히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시는 분이시긴 한데, 가족 특히 자식들에 관한 일에 대해선 1을 10으로 보신다.
가족톡방에서 하루라도 톡을 안 하면 바로 개인톡을 하시거나 전화를 하신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디가 아파서 톡을 못했나 그 걱정부터 하신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서 나도 우리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굉장히 많고, 나로 인해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이 통제되었다.
내가 이런 성격이 싫어서 애들은 그렇게 키우기 싫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성향이 애들에게 흡수된 것이다.
아빠의 양육태도도 나의 이런 성격에 한몫 보탰다.
아빠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 편이셨다.
실수로라도 뭔가 일을 그르치면 불같이 화를 내셨다.
분명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뭔가 일이 벌어지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역정을 내셨다.(체구가 워낙 좋으셔서 기본 성량이 남들보다 크시기도 했다.)
그래서 어릴 적엔 아빠 앞에선 주눅이 많이 들었었고, 좀 더 커서는 대들기도 하고, 피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아빠한테 제일 미안하다. 그냥 성격 좋게 받아 줄걸.. 아빠와의 시간을 피하지 말걸..)
아무튼 이런 소심한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것 투성이었다. 나 때문에 가족 여행은 항상 관광과 휴양 위주로 계획했다.
이제 아이들이 많이 컸기 때문에 애들은 그런 여행보다는 익사이팅한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canopy를 타거나, 스노클링을 하거나, 래프팅을 하거나, 워터파크나 ㅇㅇ랜드를 가서 놀이기구를 타거나.. 했지만 결국 나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런 것들을 내가 못하는 이유는 ‘죽을 것 같은 공포‘때문이었다.
놀이기구를 타다가 벨트가 풀리지 않을까 , canopy를 타다가 추락하지 않을까 , 래프팅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지 않을까.. 이러 저런 것을 하다가 심장마비가 오는 건 아닐까..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삶과 죽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안된다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나의 노력으로 하루를 더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꾸준히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급작스런 사고로 어제 건강한던 사람이 오늘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평생 골골하게 사시던 분이 그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반신불수로, 전신마비로 또는 암진단을 받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삶을 살지만 그래도 또 그런 분들에게도 내일이 주어지기도 한다.
최근에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나, 어떤 운전자의 실수로 하루아침에 삶을 마감하는 경우를 보면서 점점 그런 생각들이 짙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삶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기로 했다.
그래서 사막에서 buggy도 타 보았고,. 50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래프팅도 해봤다.
나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나 짜릿했다. 물론 내가 난이도 하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도전한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런 경험이 내 삶을 앗아가지 않았다.
아빠가 가신 후에 나는 조금 더 용감해졌다.
누구에겐 별 것 아닌 쉬운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어미어마한 도전이었다.
이제 canopy랑 스노클링에 도전하자는 가족들..
그들을 위해 나는 조금 더 용감해져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