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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Jan 31. 2022

옷입기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행위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  「토니 타키타니」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녀는 마치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우아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구절만큼은,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공감만큼은 생생하다.

..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맞다. 내가 좋아하는 옷 마음대로 골라 입었는데 나랑 잘 어울려서 나스러운 맵시도 나고 자유로와지는 기분. 그냥 좋은 기분이랑 다른 기분.


패션디자인 전공자였던 나는 다른 공부를 시작하고 난 후 의식적으로 옷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내적인 것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옷입기에 신경 쓰는 것은 외모에 집착하는 것이고 이는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편견이 작동했던 것 같다. 옷에 신경 쓰지 않는 거랑 내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은 그다지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좋아하는 옷 마음대로 신나게 입기를 하지 않은 기간은 5년이 넘었다. 입던 옷을 입고, 온 가족의 옷을 빌려 입고, 외출했다가 보이는 싸고 괜찮아 보이는 옷을 사서 입는 방식이었다. 아,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삭막하다.


이런 패턴이 바뀌게 된 것은 새로운 전공 공부를 마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읽게 된 『아무튼 딱따구리』라는 책 덕분이다. 옷의 수명을 2년 연장할 때마다 옷의 환경영향이 20~30퍼센트 줄어든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새 옷 안 사기를 시작했다. 당시가 2018년이다. 지금까지 새 옷을 전혀 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너무 갖고 싶어서 선물을 빙자해 얻어낸 옷도 있고 너무 갖고 싶어서 내가 갖는 대신 동생에게 선물해서 내가 빌려 입은 옷도 있다. 교묘하다. 새 옷을 안 사게 된 후 빈티지 옷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새 옷이 아니니까 괜찮아하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 이쁜 옷이 나오지 않았는지 훑는다. 여행에 갈 때도 빈티지 가게나 중고 시장을 찾아서 들른다.


옷을 고를 때 나는 무난하게 어디든 어울릴 것 같은 옷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해 보이는 피스들을 택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편한 옷. 옷이 그 자체로 완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랑 비슷한 것 같다. 색이 특이하고 이쁘거나 세부 장식이 완성도 있거나 바느질이 정갈하거나 무늬가 아름답거나 절개가 특이하거나 이런 특징 한두 개로 충분하다. 유행과는 거리가 멀며 내 몸의 장점을 완벽하게 부각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해서 내 옷 중 일부는 튄다는 말을 자주 들을 법한 것이 조금 있다. 옷장을 열면 컬러도 재질도 옷이 풍기는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하나하나 딱 내가 입을 법한 내 옷이다.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큰 고민 없이 골라 입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 정체모를 갑갑함이 해소되는 기분이다.


누군가 내가 옷 입는 것을 가지고 의외라는 듯 약간의 놀람을 감추지 않으며 은근슬쩍 코멘트하는 것이 너무 싫었던 적이 있다. 신나게 옷 입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인데, 나는 이것이 즐거운데 왜 굳이 간섭하려 하시나요- 하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딱히 싫지도 않고 뭐 그럴 수 있지 싶다. 옷 입는 것 말고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지도 않았다. 여전히 옷 입는 즐거움을 싹 뺀 채로 방문하게 되는 곳도 있다. 예전에는 그것 자체가 답답했는데 이제는 괜찮다. 내려놓아서 느껴지는 나름의 자유가 있달까.


내 마음대로 옷 입기는 내 생활의 절대적인 즐거움 중 하나이다. 목욕용품의 온갖 향기들처럼 말이다. 이 즐거움을 소중하게 발달시켜서 할망구 될 때까지 눅진하니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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