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놀이동산으로 만드는
혼자서 길을 잃은 듯 낯선 곳을 걸어 다니기 좋아한다. 사색을 위해 산책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나의 산책 풍경은 목줄 풀린 개가 킁킁거리며 온 골목에 발자국을 남기는 모습과 더 닮았다.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생소한 것들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각적 자극이 신선하고 즐겁다. 일이나 여행으로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게 되었을 때 동네 탐색을 다닌다. 하루에 3시간 넘게 걸어 다닐 때도 있다.
시골 마을 산책을 할 때는 집 입구에 있는 강아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신난다. 볼 때마다 짧은 목줄에 묶여 있는 강아지들을 보면 가슴이 아플 때도 많다. 그런 친구들 대부분은 내가 그 집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제 몫을 다하려는 듯 크게 짖는다. 몇 번 만난 후에는 전에도 무해하게 지나갔던 생명체라는 듯 나를 보고도 짖지 않는 개도 몇 있었다. 시골집 마당이나 담 아래 뭐가 심겨 있는지 보는 것도 큰 재미다. 같은 동네에서는 자라는 꽃, 나무 종류가 집집마다 비슷하다. 기후, 토양 등 여러 환경이 비슷해서 그런 건가. 꽃씨를 받아서 이웃끼리 나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어떤 집은 화려하고 예쁜 꽃을 위주로 심고 어떤 집은 먹을 수 있는 채소류 위주로 심는다. 담 위로 나무가 올라와 있는 집도 있고 마당에는 잔디만 있지만 대신 화분에 뭘 심어놓은 집도 있다. 작년에는 군산 옥봉리 산책을 많이 다녔는데 그때 당근꽃도 처음 보고 부추꽃도 처음 봤다. 논둑길을 다니면서 산딸기, 뱀딸기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뱀딸기 주변에 뱀이 많다던데 뱀딸기를 많이 봤지만 뱀은 한 번도 못 봤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산책을 할 때는 높은 곳으로 간다. 올 겨울 제주시에 몇 주간 머무를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사라봉 아래 있는 산지 등대까지 산책을 다녔다. 머물던 곳에서 삼성혈 쪽으로 걸어가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옆에 제주통일관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오키나와를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건물과 나무들을 좋아한다. 앞마당에 전시해 놓은 전투기와 장갑차는 싫다. 거기 지나면 공원이다.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열심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속 직진하다 보면 사라봉 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게 간다. 사라봉길로 가거나 제주항 방향 크게 두 갈래다. 나는 제주항 쪽으로 자주 갔다. 이리로 가면 건물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이는데 그 풍경이 이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생각난다.
(2008년 스튜디오 지브리 창립 25주년 기념 콘서트 플레이리스트 중 <마녀배달부 키키> 부분. 히사이시 조가 오케스트라 지휘하는 모습 멋지다. -> https://youtu.be/XavziZ-C6qY)
생각해보니 산책은 혼자 하거나 둘이 하는 것 같다. 여럿이서 걷는 경우는 목적지를 향해 다 같이 이동한 것 말고는 딱히 기억이 안 난다. 둘이서 하는 산책길은 주로 잘 아는 길이다. 엄마랑 산책을 가장 많이 한다. 그다음엔 동생(우리 집 반려견 토돌이 포함), 애인, 친구이다. 걸으러 나간 것은 맞지만 주목적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걸으면서 하는 대화는 마주 보고 하는 대화보다 부담이 덜하다. 그래서인지 가끔 산책하며 상대방이 신나게 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나에게 말하는 건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것은 만족스러운 일이다. 나도 가끔 그렇게 말한 후에 마음이 정리되고 후련해진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내가 괜찮은 청중 역할을 했나 싶다.
친근한 누군가와 같이 여행하면서 산책할 때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미 완전한 장면 안에 우리 둘만 스티커처럼 붙어 있는 것 같아서 귀엽다. 혼자 있는 스티커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금 쓸쓸하다. 산책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그래야 하는) 특권 같다. 이 권리를 침해하거나 이 권리로부터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것은 몹쓸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