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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Sep 15. 2020

자리를 털고 나서는 순간부터  그곳은 낯선 곳이었다

아침 바람결은 가을인가 싶었는데

한낮의 햇살은 여름빛이 남아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보던 풍경이 다르다.

익숙함이 아닌 생소함이다.

가슴을 펴고 몸을 세운다.

지친 기력이 깨어난 듯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기꺼이 접수한다.    

살던 집과 헤어짐을 갖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머물던 자리를 털고 나서는 순간부터 그곳은 낯선 곳이 되었다.

사람이 냉정한 건지, 집이 냉정한 건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도심 탈출은 못했지만 조금 벗어난 이곳은 또 다른 모습이다.

같은 서울이지만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서 그런지 마치 타지로 온 것 같다.

물설고 낯섦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이사날짜를 잡고 묵힌 짐들을 정리해갔.

미니멀 라이프까진 아니지만 버린다고 버리고 살았어도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그중 자리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책이다.

책에 대한 투자만큼은 아끼지 않는 남편이 한몫하지, 나 역시도 애착을 쉽게 버리지 못해서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고르고 골라 번번이 정리를  다시 보면 어느새 이중삼중으로 빼곡하다.

빛바랜 낡은 책일수록 깨알 같은 작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 올 리 만무하건만

쉽게 버리지 못해 여태껏 끼고 있는 것들 하며 손길 한번 주지 않은 새 책들도 부지기수다.

전자책 보다 종이책에 더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번 기회에 활자매체에 대한 미련도 버리자고 맘을 다졌다.

암튼, 책도 책이지만 입지 않은 옷이며 신발들, 부엌 살림살이까지 한 짐이 나왔. 

늘 그렇듯이 막상 버리려고 보면 왠지 더 필요할 것 같고 아까운 마음이 든다. 이리저리 훑어보고 주저함에 몇 번을 들었다 놨다 갈등이 생긴다. 뭔가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순간 난 내게 스스로 주문을 건다.

"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로 하는 새 주인에게 보내는 거라고". 

그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결정이 빨라진다.

아파트 평수가 같아서 버린 만큼 숨통이 트일 줄 알았는데 별반 달라진 건 없다.

버리는 게 사들이는 것보다 어려운 건 분명하다.    


이곳의 밤은 전에 살던 곳과 다른 빛이다.

밤하늘의 별빛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조용해서 고요하다.

그래서 어둠이 더 진하다.

아침이면 새들의 지저귐이 크게 들리고, 놀이터가 가까워선지 아이들이 뛰노는 자잘한 소리도 들린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생기와 생동감을 다.

근처에 산책 삼아 나들이를 가야 할 곳도 눈에 띈다. 이건 서서히 탐색 해갈 참이다.    


큰 방과 이어진 작은 베란다는 앞으로 내가 자주 애용할 곳이다.  

운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창밖에 서 있는 나무들과 눈인사를 나눌 수 있고 파란 하늘과 석양 노을을 감상하기에는 충분하다.

느지막한 오전 시간이면 음악과 곁들여 향긋한 차를 마시며, 책도 보고, 스케치도 할 것이다.

꽃병에 풀 향기 가득한 예쁜 꽃을 꽂아두면 더없이 좋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작은 공간을 보면 향수 같은 끌림이 있다.

하라는 공부는 팽개치고 순정만화며 명랑만화까지 잔뜩 쌓아놓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만화 삼매경에 빠져 살던 시절이 그리운 걸까? 고백컨데 나의 감성 7할은 그때 탐독했던 순정만화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음이 확실하. 아니면 나만의 렌시아를 찾고 싶은 걸까? 알 수 없지만 작은 베란다에 애정이 간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고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함께할 소소한 즐거움을 기대해본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여름을 밀어내고 있다.

또 한 계절을 마감할 때가 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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