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라는 구분 위에서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2023년에 이어 2024년에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재연됐다.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스무 살의 청년 최영우가 일본군 포로 감시원으로 참전하여 겪었던 실화를 적은 육필 원고가 손자에게 발견되면서 출간된 르포르타주가 원작이다.
소설가 이경현은 20대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구상하던 중, 우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육필 원고를 발견한다. 경현은 할아버지의 원고를 워드 파일로 옮기며 1945년 포로 감시원이 된 20살 청년 최영우를 쫓아간다.
1940년대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태평양전쟁을 펼치고,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은 극에 달했다. 조선은 일본의 전쟁에 인적, 물적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당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 20살의 조선인 청년 최영우가 있다. 고등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남원 출신의 청년이 있다. 이러한 바람을 안고 아버지에게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신문을 하나 건넨다.
일본의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조선인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한 가구당 1인의 남성은 반드시 군인으로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 장남은 가족을 돌봐야 하고 막내는 아직 너무 어리니, 너뿐이 이 전쟁에 갈 사람이 없다는 것. 동시에 차 선택으로써 포로 감시원 모집 공고를 건넨다. 포로 감시원은 전선에 서는 군인이 아니라 군무원이며, 월급이 나오니 이후 모은 월급을 쌈짓돈 삼아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그런 이야기. 최영우는 잠시 고민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고민은 의미가 없는 셈이다. 이미 그의 입대 혹은 포로 감시원 생활은 확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약간의 희망을 품어본다. ‘더 먼 세상을 구경하여 견문을 넓히자.’
포로 감시원으로서 생활은 예상보다 고됐다. 전쟁이라는 것의 실상이 우리의 생활이 될 수는 도저히 없는 까닭이다. 일본은 선전과 달리 이미 패전 중이었으며, 먼 항해 길에서 죽은 자들이 3분의 1은 되었다. 그의 직업은 이미 쓰러져가고 있는 네덜란드인 포로들을 더 다그치는 일이었다. 폭력을 쓰든, 욕설을 뱉든, 그들이 정해진 일을 하게 하지 않으면 그 폭력은 일본인 상관에 의해 본인에게로 돌아왔다. 최영우는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일에 대체로 머뭇거렸지만, 식민지 조선을 조롱하는 언사에 ‘홧김에’ 포로를 구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고, 조국은 해방됐다. 그리고 최영우는 2억 만리타국에 있다. 이제 조국에 돌아간다는 희망도 잠시, 그는 일본 군대 산하의 포로 감시원이었기 때문에 포로 학대 혐의로 군사 재판에 서게 된다. 식민지 출신이며, 선택이 있었기는 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허울뿐이며 일본 제국의 강제와 강압에 의한 업무 수행이었음을 이야기해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말단에서 직접적인 폭력을 저지른 행위자였다는 것. 그리고 네덜란드는 강한 나라이고, 자기 국민을 해친 적대국에 분노했다는 것.
이 연극에서 또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연극과 영화 장르를 결합해 독특한 미감을 관객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촬영된 영상을 연극 중에 삽입하거나, 무대 장치로서 활용하는 멀티미디어 연극은 이미 소극장과 대극장을 구분하지 않고 현대 연극에서 일반적인 연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멀티미디어 연극은 무대라는 연극 본연의 한계를 영상으로 뛰어넘어 보다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편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영상을 활용하는 방법은 기존의 멀티미디어 활용의 문법에 전면적인 질문을 던졌다. 영상은 연극의 보조 장치가 아닌 독자적인 작품으로써 연극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 무대란 무엇인지, 희곡이란 무엇인지, 그리하여 연극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영상을 경유하여 이야기한다. 무대에는 5명의 배우가 10개의 배역을 연기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동시에 그보다 많은 7명의 카메라 감독과 연출 보조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5명의 배우는 분명 연극을 하고 있지만 카메라로는 영화를 찍고 있다. 그리고 관객은 연극과 영화를 관극, 동시에 관람하게 된다.
무대세트는 단출하다. 소설가 이경현이 원고를 작성하는 책걸상 하나와 무대 중앙의 평상, 그리고 무대 뒤편의 기차길. 연극은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넓은 공간을 요구하지만, 영화는 카메라와 소품을 활용, 더 적은 공간과 약간의 왜곡을 통해 무대보다 넓은 공간감을 구현해 낸다. 겨우 팔 길이만 한 쇠 철창으로도 화면 전체는 감옥이 되기도, 아무것도 없는 평상은 조명의 각도에 따라 따스한 고향 집이 되기도 한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동시에 영화를 보게 된다. 무대의 현장감에 더해 카메라로 만드는 ‘진짜 같음’에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극에서 관객은 무대를 관음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 무엇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관극이 참여자가 되기보다, 방관자가 되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한편, 영화는 포커싱과 아웃포커싱을 넘나들며 카메라가 내 시야를 결정한다. 배우의 표정을 과다하게 인지하게 될 수도, 왜곡된 공간을 진짜라고 믿게 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우리는 ‘가짜’를 재현해 진정성을 추구하게 된다.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방식은 왜 영상 매체가 연극을 대체할 수 없는지, 연극이 영상 매체와 다른 것인지, 서로가 어찌하여 대체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시도였다. 나의 연극 보기 경험에 대해, 나의 영화 보기 경험에 대해 숙고하게 한 경험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의 개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사법부에 의해 받은 재판을 기록한 책으로 아이히만은 나치군의 장교로서,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 인물이다. 이에 반해 그의 동기는 평온했다. 학살이라 평가받는 행위는 “우리는 공무원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일 뿐”이었다는 것. 군인에게 가장 큰 죄는 항명죄, 즉 내용 불문 상관의 명령에 반항하거나 불복종하는 일이다. 단순한 사실 관계는 그의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조차 마비시켰다.
최영우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과 별개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무력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뭉이 관객에게 남았을 것이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그가 일본 군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가 불우한 사정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네덜란드인 포로를 구타하여 그의 귀가 멀게 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는 진짜 피해자인가? 가짜 피해자인가? 혹은 진짜 가해자인가? 가짜 가해자인가? 최영우의 친구는 포로들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다. 종종 최영우가 행사해야 할 폭력까지 대신 행사해 주었다. 그렇다면 친구는 최영우보다 더 가해자가 되는가? 최영우는 덜 가해자가 되는 셈인가? 친구가 가혹했기에 최영우가 비교적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연극을 본 이들은 알 것이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명확하지 못하다. 사실과 사실 아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구분이라는 것이 역사 위에서 종종 무력해지곤 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극적으로는 최영우가 사형을 앞둔 독방에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잔혹하다. 어떤 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말단 식민지 출신 군무원조차 용서를 위해서는 죽음 앞에서조차 이토록 간곡한 사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벌어진 역사 위에 문학은, 희곡은 애매모호함을 보여줄 뿐이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자꾸 흘러감에도 매 순간 내릴 뿐인 결정의 삶들에 대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