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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갈 Dec 25. 2024

[연극] 베를린의 동편
(프로젝트 이어, 2024)

"나의 아버지는 나치 친위대 의사였다"

한나 모스코비치 작 <베를린의 동편>이 여성, 퀴어, 국가 폭력 등의 주제에 주목해 왔던‘프로젝트 이어’의 제작으로 12월 한국 초연을 맞이한다. 원작 <베를린의 동편>은 전범 2세인 인물을 중심으로, 전쟁이라는 사건이 그 세대를 넘어 후대의 삶까지 파멸시키는 사태를 집요히 그려낸다.


“1970년, 파라과이 아순시온.”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파라과이는 독일의 전범들이 처벌과 책임을 피해 도망쳐 정착한 남미 국가 중 하나였다. 주인공 A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 친위대의 전담 의사로 가스실에 들어갈 사람과 노역해야 할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혼란에 빠지고, 열일곱이 되자마자 집을 떠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 자체였다. 부모가 모두 독일인으로, 독일 여권이 있던 그는 지체 없이 가장 타지인 모국, 독일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는 과학에 재능이 있었고 대학에서 생물학과 화학을 전공한 뒤 교수로부터 의대 진학을 추천받는다. 그는 의대에서도 가장 재능 있는 학생 중 하나였으나, 자신에게서 의사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결국 공부를 그만두게 된다. 학업을 중단한 후 방황하던 A는 우연히 유대계 미국인인 사라를 유대인 학살 아카이브 실에서 만나게 되고, 그 둘은 연인이 된다. A는 늘 친구들에게 말했듯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은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라고. 


한 명의 인물, 두 명의 화자

<베를린의 동편>에서 직접 입을 여는 등장인물은 총 세 명이다. 주인공인 A, A의 친구 헤르만, A의 연인 사라. 한편 2차 세계대전의 전범 혹은 피해자인 부모 세대는 존재하나 인용으로 등장할 뿐이다. 따라서 <베를린의 동편>이 진실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자녀 세대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무엇이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연극에서 말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이들을 벗어나 살지 못한다. 청년 A는 가족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나치 조직의 후원으로 베를린에 도착한다. 의술에 있던 재능은 아버지의 것이라, 정작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베를린의 월세방에 누워 담배만 피워댄다. 사라와의 관계는 부모의 존재와 그의 거짓말 속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라는 독일에 온 것을 후회한다. A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A가 전범의 자식이기 때문에 결국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갈 것임을 직감한다. A와 달리 부모가 전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태어난 곳, 파라과이를 벗어나지 않았던 헤르만은, A와 사랑을 나누었던 헤르만은 A가 주워 모은 도피처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베를린의 동편’의 이야기. 아우슈비츠. 베를린으로부터 동쪽으로 558킬로미터. 죽인 자와 죽은 자, 살아남은 자와 도망친 자들의 기원. 모든 것은 베를린의 동편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단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전쟁의 비극이 될 수 없다. 직접 저지르지 않은 것들로 고통받는, 끝내 죽음에 이르는 2세들은 결코 비극의 희생양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이 손상됨은 지나간 일의 속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손상되고 파괴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연루의 이야기. 2024년, 세상은 2차세계대전 이후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아는 모든 현대의 개념이 만들어진 기간이기도 하다. 이 연극에서 말하는 이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고통받는 이 누구도 비극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단지 고통일 뿐이다. 그저 파괴되는 것, 연루되는 것, 모두가 무언가의 원인이 되지만 정작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망연한 것. 나의 생명으로도 그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되는 것은 아닌 것. <베를린의 동편>은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그저 이곳, 남한에서 보여줄 뿐인 것이다.


무대 위의 두 배우 고윤희와 이주협은 모든 역할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A인 동시에 사라이고, 헤르만인 것이다. A는 말한다. 반면 사라와 헤르만은 무언가를 읽는다. 의도적으로 발음을 늘리고, 그로써 이것이 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만 같다. 멀쩡한 이름이 있는 사라와 헤르만과 달리 A는 A일 뿐이며, 이 극에서 유일하게 생동하며 말하는 존재임에도 그 끝에는 자살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A를 A로 고립시키지 못하게 된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배경과 사건들 속에 책임지지도 회피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A는 그 누구를 이입시켜도 이상함이 없다.


“암전, 연극이 끝났습니다”

작은 소극장. 공간서로에서는 불빛을 제외한 무대 소품은 최소화되어 있었다. 두 배우는 공연 시작 전 객석 안내를 해주었고 희곡의 시공간 배경을 육성으로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연극은 시작되었다. 이내 연극의 마지막에서 이번에는 “암전, 연극이 끝났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왔다. 커튼콜도 없이 두 배우는 무대 위 쪽문으로 나가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암전이라고 배우가 말할 때 무대는 전혀 암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무대는 어두워지지 않았고, 여전히 극 중과 비슷한 조도가 유지되었다. <베를린의 동편>은 이렇듯 희곡의 이면 장치들을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노출한 장면들이 다수 있었다. 이것이 희곡 대본임을 모두에게 주지시키듯이. 그러나 동시에 배우는 관객보다 먼저 객석에 들어와 무대 안내를 돕고, 관객의 박수도 제대로 받지 않고 무대를 떠난다. 이것이 배우의 연기가 아니었다는 듯이.


연극 <베를린의 동편>의 시공간적 배경은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런 점에서 희곡의 골재를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베를린의 동편> 연출은 연극을 연극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이것이 연극일 수만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열전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이야기가 말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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