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붉은웃음> 리뷰
연출가 김정의 신작 <붉은 웃음>이 11월 21일부터 12월 1일까지 더줌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연극 <붉은 웃음>은 러시아의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소설 붉은 웃음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붉은 웃음은 러일 전쟁의 비극 속에서 몰락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편, 연극 <붉은 웃음>은 원작을 바탕으로, 1904년 러일 전쟁과 2024년 한국 청년의 고립사를 교차시키는 내용으로 각색돼 배우 윤성원의 1인극으로 진행된다.
연극 <붉은 웃음>에는 두 개의 시간과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다른 하나는 2024년 한국이다. 연극의 시작은 2024년, 동작구의 한 임대아파트. 유품 관리사가 죽은 이의 방에 들어온다. 검은 비닐 하나 다 채우지 못한 삶의 흔적 속 유난히 깨끗한 정장 한 벌이 눈에 띈다. 자살한 청년이 남긴 것은 체납 고지서와 짧은 글들. 유품 관리사는 청년이 남긴 글을 읽어 본다. “내가 죽어도 슬퍼해 줄 사람은 없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가장 싫은 것은 혼자라는 사실.” 그는 전쟁을 원한다. 이렇게 작은 방에서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죽으면, 한국 정부가 자신을 발견해 주지 않겠는가. 죽은 이의 글 앞에서 유품 관리사는 기이한 폭소를 터뜨린다.
푸하하. 1904년 러일전쟁, 형은 두 다리를 잃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형이 죽어 사라진 형의 방에서 동생은‘괴물’이 되어 돌아왔던 형을 회상한다. 형은 돌아오자마자 글을 써 내려갔다. 정확히는 글을 쓰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잉크 없는 펜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형은 말한다. “전쟁은 붉은 웃음이야.” “동생, 내가 누구지?” 형이 죽은 건 참 다행이다. 형의 기괴함이 온 집안을 무너뜨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나 온 가족은 모두 떠났지만, 동생만은 형의 방에서 형을 기억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자살이라도 해볼까. 이 미친 전쟁을 끝내라고 사람들에게 욕을 할까. 아니, 죽은 자들의 시체를 땅 위에 올려 내가 악마가 되어줄까. 그런데, 이미 하루에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이 땅에서는 이게 다 무슨 짓일까.
암전. 다리를 잃기 전의 형이 등장한다. 형은 곱슬머리 대학생 위생병을 만난다. 그리고. 적군과 아군 사이. 적군인 줄 알고 포탄을 퍼부어댔던 상대는 아군이었고 형은 아군의 포탄에 두 다리를 잃었다. 그런데, 형은 말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다리를 잃었으니, 이제는 집에 돌아갈 수 있겠구나.” 적군의 총알이 대학생 위생병을, 형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을 죽였다. 자살과 타살, 자연사, 그러니까 죽음들의 구분은 다 무슨 의미일까. 전쟁은 붉은 웃음이다. 계속되고 불멸하는 붉은 웃음. 전쟁터에만 있지 않다. 붉은 웃음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또다시 암전. 유품 관리사가 오기 전의 임대아파트. 인생에서 열 몇 번의 자살 시도에 막 실패한 청년이 2024년 8월 쓰레기 무더기에 누워있다. 또 실패했구나. 그런데 살아있다. 살아있을 막 느낀다. 자살을 시도해도, 살아있으면 인간은 살아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뒤의 시간은 청년이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 죽은 뒤 신체가 훼손되고 변질되며 악취가 나게 되는 과정이 표현된다. 러시아의 형도, 한국의 청년도. 죽은 이의 목소리를 남은 자의 목소리 뒤에 들려준다. 그들은 죽었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살아있었다. 이 명백함을 연극은 시간과 인물을 교차해 보여준다.
<붉은 웃음>을 연출한 김정은 연출의 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연극이 사람을 살릴 거라는 기대는 그저 로맨틱한… 그렇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허무한 외침이 될까… 하지만 외쳐본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해. 그러니 뛰어내리지 마. 죽지 마. 두려워하지 마.’
이 땅은 모두 전쟁 중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연극 밖에서 살아있는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안다. 살인하라, 약탈하라, 방화하라는 명령에 휩싸인 끔찍한 세상에서, 단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단지 더 끔찍한 이들의 삶을 복기하며 자살하면 안 된다고 되놰야 하는 것인가. 그러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는 도대체 비참함을 피할 수가 없는데도.
붉은 웃음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있는 붉은 웃음은 그러나 허상이라고 연극은 온 힘을 다해 울부짖는다. 두려워하지 마.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이 사실이야. 미쳐버린 동생은 마침내 형과 대화하기에 이른다. 윤성원 배우는 무대 위에서 온전히 동생이고, 완전히 형이다. 이 독백은 도저히 대화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은 동생에게 어디에나 있는 붉은 웃음에 빠지지 말라고 외친다. 정신병자들의 적은 미치지 않은 자들뿐이다. 삶은 악인과 광인이 아닌 모든 자들에게 어두운 길일 뿐이다.
동생은 형이 생전 미쳐 휘갈긴 백지 위에서, 형의 잉크 없는 펜을 하늘로 찌른다. 물이 동생을 흠뻑 적신다. 내내 붉고 어두웠던 무대 위 조명은, 그러므로 붉은 웃음은 흘러내리는 물을 타고 푸르고 밝은 조명을 받아 사라진다. 형이 남긴 빼곡한 백지는 전쟁에 휩싸여 완전히 미치기 직전 붉은 웃음의 실체를 남기고자 남긴 형의 기록이다. 어떤 청년의 유서는 죽어 악취가 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삶 속에서 남긴 누군가의 생의 기록이다. 그러니 기억하길. 걷고 싶은데, 길이 없는 자에게, 머물고 싶은데 머물 곳이 없는 자에게, 여전히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힘든 자에게.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그러므로 붉은 웃음은 허상이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픽션을 읽는다는 것은, 연극을 본다는 것은, 혹은 희망과 기대를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삶은 결국 허무한 일. 하지만 허무하다고 말해버리면 안 되는 일. 그 근거를 움켜쥐고 싶어 엉엉 울 수밖에 없는 일. 살아있다는 걸 느껴버린 나는 푸른 조명 아래 커튼콜에서 엉엉 울어버려 엉성한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연극 <붉은 웃음>은 온전히 연극이었고, 커튼콜로 그 온전함이 마무리되어 암전이 깨지는 순간 삶으로 돌아온 나는 붉은 웃음의 세계로 다시 걸어 나간다. 이것이 관객들에게 커튼콜로 마무리될 수 있는 세계, 연극이 필요했던 까닭.
*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