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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갈 May 14. 2024

[리뷰] 연대의 공유지 의류수거함

대학로 뮤지컬 <오즈의 의류수거함> 후기

지능(뇌)을 얻고자 하는 '허수아비'와 심장을 원하는 '양철 나무꾼', 용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겁쟁이 사자'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에게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부탁하기 위해 도로시와 함께 경쾌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가는 도중 많은 문제를 해결해 나감에 있어서, 항상 모든 좋은 생각은 허수아비를 통해서 나오고, 심장이 없어 감정을 못 느낀다는 양철 나무꾼은 캐릭터 중에서 제일 잘 울고, 겁쟁이 사자는 가장 먼저 진격한다.


<오즈의 마법사>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어쩌면 무언가를 빼앗긴 자들이 함께하며 결국 성장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해 낸다. 그들은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진다는 도시 에메랄드를 향해 여정을 시작하나 에메랄드는 허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룬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여정 자체에서 그들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사람과 과정을 통한 변화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종종 냉소와 비관으로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지만 그것을 희망으로 여겨온 것 역시 인류의 오랜 버릇이다.



뮤지컬 <오즈의 의류수거함>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4년은 원작 소설이 발매된 때였고 학창 시절 도서관에 상주하던 나는 <오즈의 의류수거함>의 발매 직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즈의 의류수거함>은 <오즈의 마법사>의 핵심 메타포를 적절히 활용한 청소년 소설이었다. 도로시라는 이름을 가진 고등학생은 의류수거함을 통해 동료를 만나고 상처를 회복한다. 도로시가 만나는 동료들이란 탈북민, 홈리스, 폐지 수거 노인, 약물 중독자와 같이 세상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사회에서 낙오되었다거나 배제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개인에게 부과된 두터운 해명에서 찾는다. 몸과 정신이 건강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수행하며 사회적 기준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여되지 않는 해명의 상황은 이들은 자꾸만 마주쳐야 한다. 예를 들어 홈리스의 발생은 주거 빈곤과 불안정한 노동시장 혹은 여성 홈리스의 경우 선행된 가정폭력이 거리 생활을 시작하는 주된 원인이지만 그들은 스스로 나태하거나 더러운 사람이 아님을 자꾸만 증명해야 한다. 사실 홈리스가 아닌 이들도 종종 어쩌면 자주 게으르지만 말이다. 이들이 받지 않는 질문들을 홈리스는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 <오즈의 의류수거함> 서사의 탁월함은 여기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오즈의 의류수거함>에는 세상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기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모습, 혹은 동정의 대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한 인물 한 인물의 개성으로 이들이 어떻게 기이한 동업을 함께 하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만 탁월한 초반 기획력에 비해 끝으로 갈수록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상실하고 제대로 초기 설정요소들을 회수하지 못한 점은 아쉽게 느껴졌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충분히 좋은 이야기였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어떤 뮤지컬로 각색되었을지를 보는 것은 기대되는 일이었다.


연대의 공간 의류수거함!


의류수거함은 극 중 독특한 공간감을 부여한다. 즉 의류수거함은 쓰레기통과 같고 다르다. 의류수거함과 쓰레기통은 모두 더 이상 쓸모없어진 것들의 공간이라는 점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의류수거함은 말 그대로 수거 과정을 거치기에 내용물은 누군가에게 다시 보이게 된다. 입시 실패로 인하여 자살을 기도하던 일구오의 일기장과 표창장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도 일구오가 쓰레기통이 아닌 의류수거함에 자신의 물건들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손쉽게 자연화하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역사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상업 혹은 농업 영역의 변화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그중 농업의 변화를 중심으로 본다면,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농촌에서 할 일을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면서 그들이 유휴 노동력이 되었고 시초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농민이었던 이들이 할 일을 빼앗겼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농사지을 땅을 빼앗겼다는 말이 된다. 이는 소유권을 중심으로 재편된 현대의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농촌에서는 주인 있는 땅도 있었으나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공동의 토지가 있었다. 이것은 커먼즈, 공유지였다. 즉 소유권의 개념이 현대와 같이 만들어진 것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는 근래의 일이라는 것이다. 공유지에서 농사지어 밥을 벌어먹는 이들은 물론 풍족하지 못하고 가난했지만, 도시의 거지나 실업자는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이렇듯 공유지를 먹고 사람들을 바보 같은 실업자로 뱉어내며 자라났다.


사람들은 붕어빵이나 호떡 같은 길거리 음식을 추억하지만, 길거리 음식 장사를 하는 노점에 대한 인심은 각박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금도 내지 않고 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배우지만 길거리의 홈리스는 비난한다. 그들은 성실하게 노동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색있게 가게를 꾸려 동네 상권을 활성화했더라도 상가 세입자는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한다. 그럴 줄 몰랐냐며 억울할 것도 없이 빨리 건물을 매입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세입자의 아둔함을 탓한다.


노점은 장애인이나 노인과 같이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어려웠던 한국 도시 빈민의 오랜 생계 수단이었다는 것은 잊혀진다. 97년도 금융위기 이후 거리를 가득 메웠던 홈리스들이 잊혀진다. 강남 아파트 월세보다 높은 평당 월세를 지배하는 쪽방촌의 면면이 잊혀진다. 괜찮고 아름다운 가게들이 잊혀진다. 소유권만이 유일한 원칙으로 남은 세계에 뒤처진 자들의, 그러니까 대부분의 우리들이 있을 공간은 이렇게 사라진다. 동네 도서관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거나 기본권 혹은 생존권과 연관된 사회의 필수재가 기준 없이 사영화되는 것 역시 공유지의 상실이라 명명할 만하다.


이러한 세계에서 의류수거함은 이 세계의 기준과 다른 품격을 지닌다. 의류수거함은 이해타산의 관계 맺기가 잠시 중단된 괴짜들의 공유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의류수거함을 털어 빈티지 가게에서 수익을 창출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아마 도둑들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들이 알고 봤더니 사회적 약자라면? 그래서 그들이 못 믿을 이들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뮤지컬 혹은 소설로 이 이야기를 접한 이들은 그렇게 각박하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사의 힘은 그런 거다. 세상의 뻔하고 유치한 비난을 가볍게 뒤튼다는 것. 우리는 의류수거함을 통해 단단해지는 그들에 관계에 깊이 이입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상실한 것을,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당연했던 것을 낯설게 볼 수 있게 된다.



의류수거함과 마찬가지로 도로시와 친구들에게 공유지 역할을 하는 것은 마마의 식당이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이렇게 힘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마마는 과거의 상실로 무너져 내린 가슴을 타인과의 연대로 바꾸어 낸다. 마마의 밥은 그렇기에 단지 밥 이상이다.


연대의 공간 의류수거함?


그렇지만 뮤지컬에서 아쉬웠던 점은 연대의 공간으로서 의류수거함을 구축하는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극장 뮤지컬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기도 한 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애초에 원작 소설 역시 얼버무리는 결말을 지녔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80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극을 전개한다는 매체의 특성이 둘째 이유다. 원작의 경우 소설임으로 도로시와 일구오 외에도 마녀나 마마나 숙자(홈리스)씨 등의 서사를 챕터별로 섬세히 다룬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사회의 범주가 아닌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원작의 서사 전개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사랑스러운 소설로 남았던 이유는 캐릭터에 대한 스토리텔링 역량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뮤지컬 <오즈의 의류수거함>은 극 특성상 여러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은 도로시와 일구오, 그리고 그 둘 간에 흐르는 미묘한 애정 기류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대표적으로 생략된 서사 중 하나는 숙자 씨의 이야기였다. 숙자 씨는 홈리스이나 뮤지컬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본업이었던 수의사로 복귀할 결심을 한다. 그렇지만 숙자 씨가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직업인 수의사를 그만둔 사유는 극 중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에서 숙자 씨가 수의사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가축에 대해 행해진 살처분 과정에서 발생한 직업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원작에서도 숙자 씨가 다시 수의사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섬세히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숙자 씨가 어떤 인물인지는 묘사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사회에서 동물과 가축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문제를 환기했다.


그렇지만 뮤지컬에서는 각 인물의 상처만 드러날 뿐 그 상처의 원인이 된 사회 문제들은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의 연대라는 극의 전체 주제는 반만 전달될 수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이상하며 과장되어 보이고 그들이 한 팀이 되어간다는 줄거리는 삐거덕거리기도 한다. 이렇듯 서사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소규모 인원으로도 활기차게 진행되는 뮤지컬과 중간중간 배우들의 넉살과 유머는 이 뮤지컬을 유쾌하게 전개했다고 생각한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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