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연극 <스카팽> 후기
올해 3월 나는 엉엉 울었다. 내가 재미없어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는 얼마 안 가 나의 남은 재미가 모두 없어질 것만 같았다. 유머는, 재미는 삶의 무게를 내 마음대로 정하는 주체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겁다고 진짜 무겁게 들고 있다가는 어깨가 탈골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능구렁이처럼 그걸 왜 들고 있냐며 풉 하고 웃어주는 재치가 필요하다. 바뀌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정신은 차려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게, 이걸 내가 왜 들고 있냐.’ 재미를 잃을까 봐 가장 재미없는 방법으로 슬퍼하다니. 그럴 때 필요한 것을 떠올렸다.
“우리가 곤란할 때 언제나 멋지게 도와줄 사나이, 스카팽”
그렇게 나는 <스카팽>을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2022년 스카팽을 처음 봤던 겨울을 떠올린다. 막이 올라가고서는 한시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부자들은 우스웠고 사랑은 진실했고 결말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잔뜩 웃고 나오니까 나의 마음은 모난 데 없이 크게 부푸는 듯했다. 그래서 올해의 스카팽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배가 아리게 깔깔 웃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게 우스워져서 잔뜩 살고 싶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라가는 <스카팽>은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국에서 임도완이 연출을 맡은 풍자극이다. 이번 공연은 벌써 서울에서 4번째 공연으로 나는 2022년에 이어 두 번째 관극이었다.
막이 오르면 작가 몰리에르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몰리에르는 작가인 동시에 배우다. 몰리에르는 자신이 만든 극과 배우들을 소개한다. 우리는 연극을 볼 때 이미 우리가 허구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러나 <스카팽>은 무대 올리기가 무대의 주제인 이중 구조를 가지는 연극이다. 이렇게 구성을 겹겹이 했기에 <스카팽>의 풍자와 유머는 좀 더 과감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으리 이건 그냥 연극일 뿐이에요’
배우들의 노래로 막이 오르면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부르주아인 아르강뜨와 제롱뜨는 자식의 정략결혼을 약속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 사이 둘의 자식들은 각자 신분도 모르는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부모의 정략결혼 약속을 알게 된 두 자식은 제롱뜨의 하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스카팽은 능글맞게 말한다.
“사실 제가 끼어들어, 해결 안 된 건 거의 없죠.”
스카팽은 두 도련님의 부모를 속이며 도련님들의 사랑을 이루어지게 만든다. 도련님들은 덜떨어졌으며 두 부모는 가진 것이 많아 신경질적이나 마찬가지로 멍청하다. 그들 속에서 스카팽은 아주 약간의 잇속만 차리며 실속있게 일을 진행한다. 현란한 리듬과 템포, 코미디, 패러독스, 페이소스, 감동과 사랑, 연민, 그리고 약간의 눈물까지 보여준다.
같은 것에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같은 것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말을 돌이켜 본다. ‘상대방도 재미있어야 농담이지!’ 그런데 이 말을 지키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한 농담이 우습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그리하여 지나치게 분위기가 우울해지거나 멋쩍어질 때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또 실패했군. 농담은 무례를 닮았다.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무례하지 않은 농담을 하는 법이 아니라 무례할 수밖에 없는 농담이 어떨 때 웃을만한 것이 되는지 아닐까 변명해 본다.
농담이 무례함을 닮았다는 것은 무언가를 콕콕 찌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패하는 것이 농담인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객석을 향하는 코미디는 오죽할까. 그런 점에서 나는 어렸을 때 즐겨보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을 생각해 본다. 그때도 모든 프로그램을 보고 웃을 수는 없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마빡이’라는 프로그램은 개그맨들이 자기 이마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때리는 구성이었고 고통받지 않는 이가 더 고통받는 이를 놀려주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웃음 포인트였다. 인기가 많아 제일 마지막에 방영되던 코너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재미없을 수 없었다. 누군가 아픈 걸 보는 것은 힘들었기 때문이다.
무례해질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는 유머가 재치 있으려면 일정한 선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선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일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으로 국내에서도 알려진 켄 로치 감독은 EBS 위대한 수업에서 코미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코미디를 배우고 즐기며 자랐어요. 늘 이런 코미디를 접하고 즐기려고 노력해 왔죠. 코미디는 최고의 투쟁 수단이니까요. 사는 게 힘들수록 농담도 재밌어지죠. 그래서 부르주아지나 중산층이 코미디에 소질이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소재로 농담을 하겠어요? 골프채요? 뭐로 웃기겠어요? 부르주아지는 농담거리가 없습니다. 코미디는 노동계급의 삶에서 와요. 저는 그런 사실을 배웠고 동료들과 코미디를 즐겼죠.”
앞서 소개한 대로 <스카팽>은 풍자극이다. 정해진 플롯은 있지만 시기에 따라 대사를 변경하고 관객의 반응에 따라 애드리브를 치기도 한다. 회차별 관람을 한 것은 아니지만 22년과 24년 스카팽은 같은 플롯 속에서도 대사와 애드리브로 구성하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풍자극이나 블랙 코미디를 자처하는 공연 중에는 관객에게 웃음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풍자를 흉내 내는 풍자를 마주할 때라 할 수도 있겠다. 풍자의 핵심은 비판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 방법이 간접적이어야 한다는 것 두 가지이다. 돌려 말하기에 문학적이며 맞는 곳을 찔러야 하기에 배우나 연출가는 입장을 선택해야만 한다. 풍자를 흉내 낸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전혀 아무것도 찌르지 않고 있는데, 합의된 안전한 공간에서 찌르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 이상해서 재미가 없는 거다. 고양이는 저 멀리 있는데 고양이한테 달아야 할 방울을 보며 의기양양한 태도를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풍자의 대상은 돈이 많은 자와 권력을 가진 자이다. 레퍼토리는 비판보다는 부정에 가깝지만, 그 또한 보는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살다 보면 가진 자 때문에 울분이 터지는 날이 없지는 않으니 그렇게 야박한 기준으로 풍자극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근래에는 종종 그런 되바라진 부정조차 회피하는 레퍼토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는 풍자라는 말이 조금은 무안해진다. 생각해 보니 요새는 돈 많은 자도 풍자하지 못하는 거 같긴 하다. 다들 돈이 많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릴 수 있는 건 하나씩 없어지고 그나마 풍자극에 남은 건 얄팍하게도 유명 정치인 몇 명뿐이다. 그들의 말투를 그들의 발언을 비웃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상 아무것도 비웃지 못한다.
다시 돌아와 내가 재미가 없어질까 엉엉 울었던 때를 생각한다. 그때 흘린 눈물은 거짓된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선에 있지 못할 때, 공통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할 때, 연극이라는 픽션 위에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패기마저 상실할 때 우리는 그렇게 시시한 인간들이 되어버리나 보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런 시시한 우리들의 모습이었나 보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여전히 스카팽은 볼만한 연극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도 선뜻 관극을 결정할지는 모르겠다. 냉소는 간편하고 풍자는 난망하다. 스카팽은 대극장 연극이고 대극장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것들의 이야기는 높지 못하다. 그래서 이번 스카팽의 유머 수준에 대해 말하기보다 우리가 유머를 수용할 수 있는가에 관해 묻고 싶다. 부자들을 혼쭐 내고도 병든 몸밖에 남지 않는 스카팽의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