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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코칭랩 Aug 02. 2020

혁신하겠다고?

조용필을 통해 보는 자기혁신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도 그 색깔이 변하지 않는 바다와 같은 사람’
 
조용필에 대한 평 중 필자가 매우 좋아하는 말입니다. ‘탐구와 호기심’ 덕에 조용필은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기가 막힌 것은 그리 하고도 바다와 같이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록을 기반으로 발라드, 댄스, 트로트 심지어 민요와 동요풍까지 대부분의 장르에서 정상급의 아웃풋을 만들어 내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심에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두고 싶습니다.
 
19집 <Bounce>는 공개되자 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더 이상 오를 정상이 없을 것 같았던 그가 또 다른 봉우리로 올라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조용필에게는 ‘자기 혁신’ 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추가됩니다. 어느 기업은 19집을 자기혁신의 모델로 임직원들에게 선물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필 연구를 하다 보면 그의 혁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 혁신은 위기의 고비 때마다 돌파구가 되었으며 오늘의 만렙 조용필을 만들어 낸 동력이 되었습니다.
 
혁신1. 조용필의 시대를 열어 젖힌 목소리 혁신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선풍적 인기를 끈 직후 대마초 사건으로 수십 명의 가수들이 활동 금지 조치를 받을 때 조용필도 활동금지 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평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가수들이 음악 활동을 접거나 아예 한국을 떠나며 우리 대중음악계가 암흑기에 접어듭니다.



1975년 11월부터 1년여동안 일제 단속으로 138명의 연예인을 포함, 1000여명이 검거되었던 이 일로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등 당대의 많은 유명 가수들이 음악을 포기하거나 아예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조용필은 1968,9년경 미군 부대 밴드 활동시 주위 권유에 따라 몇번 피었지만 두드러기가 나는 등 몸에 맞지 않아 더 이상 피우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었으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유명해진 덕에(?) 1979년 12월 해금될 때 까지 3년여 동안 음악 활동이 금지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나 지금이나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과도한 법집행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맞이한 첫번째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 대신 혁신을 선택했습니다. 우연히 민요 <한오백년> 접하고는 당시 발매되어 있던 한오백년 테이프를 모두 사서 연구(역시 탐구 조용필)하고 그 창법을 익혔습니다. 조용필이 판소리를 배웠다 이런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미성으로서는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아예 목소리 자체를 바꾸는 목소리 혁신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1979년 말 해금이 되고 서울의 봄이 오면서 새로운 목소리로 불리워진 <창밖의 여자>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폐부를 강렬하게 찔렀습니다. 혁신의 성과였습니다.

 
조용필의 음색은 호불호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살짝 비음이 섞이면서도 속이 꽉찬 잘 제련된 쇳소리 같은 그 묘한 음색의 개성과 독특함은 조용필과 여타의 가수를 구분 짓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미성에 만족하고 목소리 혁신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조용필의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
 
혁신 2. 수퍼스타 브라운관에서 뛰쳐나와 콘서트장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다.
 
없어진 TBC까지 포함하여 MBC, KBS 도합 11번의 가수왕이 된 조용필은 1986년을 끝으로 일체의 순위와 관련된 수상을 거부 합니다. 80년대 후반은 이문세, 변진섭 등으로 우리 대중음악의 지평이 또다시 넓어지는 시기였으며, 90년대 초반으로 들어오면서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등으로 대변되는 소위 X세대가 시작됩니다. 경제성장을 통한 풍요로움이 바탕이 된 1990년 초반의 음악 시장은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조용필의 두번째 위기로 한때의 수퍼스타로 시대 조류와 함께 서서히 잊혀져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택한 혁신은 ‘콘서트’ 였습니다. ‘Video kill the radio star’ (1979년 영국 밴드 버글스), 비쥬얼과 퍼포먼스 등과 같은 음악 외적 파워가 훨씬 강력해진 그때에 브라운관을 벗어나서 대중들과 라이브로 직접 만나는 프레임 전환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공연장이 텅 비었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음악의 본질을 가장 중시 하면서도 시각적 즐거움까지 선사하는 무대 연출에 공을 들이면서 조용필은 콘서트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X세대는 캐나다 작가인 더글러스 쿠플랜드가 1991년에 발표한 소설 《Generation X: Tales for an Accelerated Culture》에서 처음 나온 용어. 90년대 초중반 경제적 풍요를 기반으로 개성과 자기 주장이 강해진 세대로 이른바 산업 역군이었던 386세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대중문화가 한층 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 슬램덩크, 삐삐 등으로 대변됩니다. 80년대의 수퍼스타 조용필이 자기혁신을 하여야만 할 환경적 요인이었습니다.                                   


콘서트 못지 않게 정말 높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소위 대중적 인기 전성기에서 한걸음 내려온 이후에 오히려 한층 성숙해진 ‘고퀄’의 음악적 성과들입니다. 12집, 13집과 14집으로 이어지는 이 음악들은 25년도 훌쩍 넘어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애호가들의 히든 넘버였다가 이제는 대중적 인기까지 얻게 된 12집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같은 곡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러나 15집, 16집, 17집으로 이어지면서 조금 주춤 하는가 했던 조용필은 18집에 와서 다시 자신의 색깔을 찾아 가기 시작하더니 19집에서 와서 또다시 대박을 터드렸습니다.  
 
혁신3. 성인가요를 하라고? 아니다, 나는 10세 때 듣고 70대가 될 때까지 기억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겠다. 
 
참으로 엄청난 생각입니다. 한때 주위에서 이제는 중장년 성인들을 위한 가요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요구가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들 그런 길을 갔으니까요. 그러나 조용필은 온 몸으로 거부한 듯 합니다. 2005년 18집 이후 10년 동안이나 다음 앨범이 나오지 못한 것이 이런 딜레마와 그것의 극복을 위한 또 다른 혁신의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곡을 작곡하고 폐기하고, 무수한 곡을 받고 또 폐기하고 60이 넘은 가수 조용필의 자신을 색깔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엄청난 고민이 있었을 것 입니다..
 
19집 없이 콘서트장의 조용필로만 끝났으면 추억과 함께 서서히 빛 바래가는 과거 완성형의 가수로 평가되며 세번째 위기가 왔을 것입니다. 허긴 위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만큼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잡고 시대를 평정한 대중음악가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용필의 위대한 점은 언터처블 1위 레이서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4집의 <고독한 런너> 처럼 말입니다. 경쟁자도 없고, 페이스 메이커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이것이 조용필의 혁신입니다.
 
63세 조용필이 부른 <바운스>는 10세 초등학생들까지 춤추고 흥얼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70이 되었을 때 기억 한편 어느 한 구석에서 유년의 추억으로 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신선함’에 대하여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면 더 이상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올해 나이 69세의 조용필이 여전히 오빠인 이유입니다.
 
자기 혁신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 라 부릅니다.
 
자기혁신은 왜 하여야 하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일을 한다는 것은 생계유지 뿐 아니라 자기실현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100세 인류)는 지금껏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현실입니다. 지난 해 94세 나이로 돌아가신 호기심 많았던 저의 부친이 90쯤 된 어느 날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발전할지 참 궁금하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라는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TV가 있는지, 냉장고는 있는지 호구 조사를 하며 선생님 앞에 손을 들었던 예전 세대들은 IcT, IoT, VR, 빅데이터 등의 낯선 4차 산업 용어의 홍수 속에 내심 뭔가 불안합니다. 얼마 전 서울대를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으로 퇴직하신 고객이 대학생 아들이 비트코인 투자를 하면서 암호화폐니 블록체인이니 하는 말을 하는 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하면서 내가 언제 이렇게 시대에 뒤쳐진 것인가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고 하더군요.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앞서가지는 못하더라도 편승은 해야 할 것이며, 편승까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부정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부정하는 목소리와 불만을 토로하는 당신을 세상은 ‘꼰대’라 할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자기혁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혁신한 사람이 대단해지는 것입니다.
 
자기혁신은 세상의 흐름을 부정하지 않고 그에 맞는 새로움을 내게 입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6년간의 교육으로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0대 중후반이면 주직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는 현실이 그 증거 입니다. 40대 후반이라고 해봐야 자녀들이 중고등학생 정도인데 이때 직장에서 밀려난다구요? 내가 누군데?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멍하니 눈뜬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예방적 차원의 자기혁신은 위기의 파고를 넘기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자 무기가 될 것입니다. 조직 내에서의 경쟁력을 유지시키든가 아니면 적절한 기회에 조직 밖에서 성과를 이끌어 내도록 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처럼 퇴사를 하고 바람 부는 황야에 서고 나서야 비로서 정신 차릴 수도 있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100세 인생이라고 하는데..조금 늦어져도 됩니다. 단, 혁신을 하면서라면 말입니다.   


‘똑 같은 방식을 쓰고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자이다’       
        by 아인쉬타인



혹시라도 기존과 또는 남들과 같은 방법을 쓰고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자기혁신을 위한 자원들은 이미 우리 안에 모두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들만 자기혁신을 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신을 했기 때문에 대단한 사람이 된 거입니다. 커리어 코치로의 직업전환, 나이 들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배우고 성찰해 온 것들을 정리하고자 글쓰기 작업을 시작한 이 모든 것들이 저 나름의 혁신 과정입니다. 이 혁신 끝에 저 자신과 주위가 어떻게 변화 되어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과는 분명히 다를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 달라져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서 오늘도 자판을 두드립니다.
 
<보너스>
 
Q. 노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A. 자꾸 부르는 거여요!
 
조용필은 공연 일정이 정해지면 하루 종일 직장인 출퇴근 하듯이 아침부터 8, 9시간씩 연습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서 내노라 하는 연주자들이고 어디 가면 다 선생님 소리 듣는 위대한 탄생 멤버들이 연습시간에 늦으면 타고 오던 고급 승용차를 처 박아 두고 더 빠른 교통편으로 갈아타고 움직인다는 인터뷰가 있을 정도로 연습에 대한 그의 집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백번, 수천번을 불렀을 법한 노래를 노래방에 까지 가서도 연습하곤 하는 조용필을 보면 대중 앞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 엿보입니다. 그러한 자기관리와 꾸준한 연습 덕인지 유튜브에서 80년대든 90년대든 2000년대든 어느 라이브 실황을 랜덤으로 틀어봐도 원곡 발표 무렵과 비슷하고 일관된 목소리와 가창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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