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 사거리 모퉁이에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다.
박스 조각에 매직펜으로 쓴 가격을 읽어보니
근처 대형 마트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다.
여러 종류의 제철 과일과 야채가 가득 쌓여 있어, 사람들이 몰렸다.
물건을 고르고 사람, 계산하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
도로를 지나는 행인들까지 동선이 엉켜 가게 안팎은 출근 지하철처럼 혼잡했다.
거기에 호객하는 직원의 외침까지 시끄러워
목청이 큰 사람이 아니고서는
물건에 대해 물어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며 물건을 골랐고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설 때 누가 끼어들지 않을까 신경전이 벌였다.
계산대 직원은 녹색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계산하고서
"직접 담아가시겠어요?" 묻고는 비닐봉지를 장바구니에 넣어 손님에게 돌려줬다.
결제는 현금이나 계좌이체만 가능하고 카드는 안된다고 했다.
손님들은 군말 없이 현금을 내밀어 계산하고 뒷사람에게 쫓겨나듯 밀려나
직접 비닐에 물건을 담았다.
빨간 딸기, 노란 참외의 달큼한 향에 끌려 사 볼까 하고 달려들었다가
쌓여 있는 무 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걸 보니
아무리 싸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한 10여 미터 아래에 규모는 작지만 과일, 야채 파는 가게가 한 군데 더 있었다.
모퉁이 가게와 가격은 비슷하나 과일이 천 원 정도 비쌌다. 손님은 서너 명 정도였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양상추 하나를 들고 나와 앞쪽 매대에서 딸기를 골랐다.
양상추를 들고 다른 손으로 딸기를 집으려니 불편했다.
중년의 여직원이 얼른 다가와 계산대에 갖다 놓겠다며 양상추를 받아주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다른 과일과 야채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안경 쓴 중년 남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안녕하세요?"인사를 건넸다.
검은 비닐봉지를 펼치고 물건을, 하나씩 잘 들리도록 금액을 말하며, 담아주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계산대로 와 "홍고추 어딨 어요?"라고 물었다.
사장님은 그 아주머니에게 단호하고 부드럽게 "잠깐만요." 하고는
내게 "만칠천오백 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지갑에서 카드를 커내 건넸고 계산을 마쳤다.
"안녕히 가세요." 사장님이 또박한 음성으로 인사하니
"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왔다.
물건 담은 봉지를 들고 가게를 나오는데
등 뒤에서 "홍고추는 저 끝 오른쪽에 있어요."
그제서야 아주머니에게 대답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별 일인가 싶겠지만 경험 상 야채가게 사장님과 같은 응대는 흔치 않다.
홍고추 아주머니가 끼어들며 물은 것, 간단한 대답임에도
사장님은 앞선 사람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방해하지 않고 집중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나는 손님 대접받은 기분이 되어 가게를 나왔다.
가게, 카페, 음식점, 편의점, 마트...
사람 많은 곳에서 줄을 서거나 계산대 앞에서 직원과 몇 마디 나누는 것이 일상이다.
직원이든 손님이든 존중받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무더기로 쌓아놓은 '무'가 아니다. 더미가 아니다.
'잠깐만' 상대방을 살펴보면 존중할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