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비용'과 '실패할 자유'
주변을 보면 소비할 때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갔던 곳을 주로 가는 단골집 마니아들과 그때 그때 새로운 집을 검색해서 찾아가는 개척자들. 나는 단골집이 많은 사람이었다. 늘 가던 양꼬치 집과 소곱창 집, 너무 자주 가서 사장님과 친해진 부천의 술집, 여행지조차 전에 가봤던 코스로 다녔다. 잘 아는 곳들이라 누구를 데려가도 실패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단골집이 많아진 이유가 단순히 좋지만은 않았다.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 안 사고 그냥 못 나오는 낯가리는 성격과, 여러 곳을 검색해서 하나를 결정하지 못하는 미적거림, 여기에 모르는 곳에 갔다가 돈 날릴까봐 걱정이 되는 마음까지 개노답 삼형제가 콜라보로 공격하면, 역시 구관이 명관이지-하며 갔던 곳을 찾게 된다. 단골집은 언제가도 마음 편한 내집 같은 곳들이니까.
갔던 곳을 다시 가고 썼던 물건을 쓰는 건 대체로 행복했다. 아는 맛과 아는 것들은 예견된 만족이었다. 문제는 소비 패턴이 그렇게 굳어지며 조금씩 나타났다. 실패 없는 소비를 한 덕분에 안전했지만 안전 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돈을 벌며 금전적으로 괜찮은 상태에 이르러서도 이전에 해보지 못한 일을 할 때면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아는 것들을 떠올리느라 선뜻 도전하지 못했다. 돈도 써본 놈이 쓴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번에 2시간에 17만원짜리 스파를 하면서도 생각의 흐름이 비슷했다. 심지어 내가 내는 돈이 아니라 선물 받는데도 그랬다. 둘이 34만원이면 호캉스를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멀리는 못가더라도 여행을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지만 다른 걸 살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이 온통 기회비용으로 가득 차서 상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마음을 고쳐먹은 건 생각의 결론이 내가 언제 스파를 해보겠냐-에 도달하면서였다. 내 기준 사치라고 생각되는 영역도 해봐야 돈 지랄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살면서 남는 건 경험뿐이라는데 스파 비스무리 한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을 터였다. 꼭 행글라이더나 스카이 다이빙만 유의미한 체험이 아닐테니까. 스파를 선물하겠다는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고맙게 받을 필요가 있었다.
마음의 갈등 끝에 도전한 스파는 어땠냐고? 정말 좋았다. 주변 소중한 사람들이나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을 만큼. 가끔 건강 마사지를 받으러 간적은 있었지만 그런 마사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직원의 친절한 응대와 청결한 가게 컨디션, 은은한 노래와 조용조용한 테라피스트님 덕분에 마사지 받는 내내 노곤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끝내고 나오니까 홍차와 버터 쿠키가 준비되어 있어서 맛있게 먹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만족이었다. 이런 시간이라면 17만원을 내도 괜찮겠다 싶었다. 물론 비싸서 자주는 안 되고 가끔이겠지만.
예전의 나였으면 스파를 선물 하겠다고 했을 때 바로 거절했을 거다. 비싸서 절대 안된다고 덧붙이며. 그 다음 단계로 다른 걸 하자며 그나마 익숙한 호캉스나, 여행, 레스토랑의 식사를 떠올렸을 테고, 그랬다면 평생 스파는 몰랐을 거다. 스파를 안 한다고 삶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안해본 경험을 했던 일들과 비교해서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기회 비용을 덜 생각하면서 실패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제 모르는 카페와 밥집에 잘 간다. 이전에 단골집만 주구장창 다니던 것과 비교하면 새로 태어난 수준이다. 가끔 비싸고 맛없는 가게에서 돈을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같이 간 사람과 농담으로 승화하며 넘어간다. 다행히 검색 기능이 좋아져서 완전히 멸망한 사건은 손에 꼽는다. 먹는 것과 더불어 경험들도 덥썩덥썩 시도하면서 삶의 모습이 다채로워졌다.
사장님과 눈빛만 마주쳐도 자동 주문이 되는 단골집이 주는 즐거움과 미지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범위를 넓혀 나가는 의미에서라면 망할 자유를 누려보는 것도 좋다.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멋진 시간들도 많지만, 개중에는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도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 나에겐 얼마 전 스파가 그랬다.
written by 토핫(핫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