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같은 타격 운동은 남자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에 여자, 남자 이름표가 붙은 것도 아닌데 글러브를 낀 주먹을 떠올리면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살면서 누군가를 때린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주먹을 쥐고 뭘 쳐(?) 본 적도 없다. 악력이 약한 편이기도 해서 손에 힘을 세게 쥐어본 경험도 거의 없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복싱장 문을 열고 있었다.
복싱에 등록하기 전날, 우리 집에 절친 셋이 모여 끝없이 먹고 한없이 수다를 떨었다. 빵 몇만원 어치를 해치운 다음, 입짧은 햇님 먹방을 틀어놓고 로제 떡볶이를 주문했다. 1인 당 몇 천 칼로리 씩 먹고 아름답게 헤어질 모임이었는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보통 때는 누군가가 새로운 운동을 해볼래? 같은 말을 던지면 나머지 사람들이 좋아좋아 반응하다가 금세 추진력을 잃었다.
하루종일 많이 먹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너무 오래 운동을 쉬어서 몸이 근질근질 해서인지 갑자기 모두에게 행동력이 생겼다. 운동할까? 좋아! 각자 집들의 중간 지점을 찾아보자! 셋이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체육관을 찾다보니 선택지가 없었다. 집 가운데에 복싱장이 아니라 주짓수장이 있었으면 우리는 주짓수 도복을 입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거다.
할 수 있는 운동 종목이 복싱으로 추려지자 바로 다음날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식기 전에 돈을 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파였다니!! 어영부영하다가는 다시 운동과 거리가 먼 나로 돌아갈 터였다. 다들 운동을 오래 안해서 좀이 쑤신 상태기도 했다. A는 수영을 오래했지만 코로나가 무서워서 쉬고 있었고 B와 나는 작년 9월에 헬스를 그만 둔 이후로 홈트로 전향해서 체육관과 멀어진지 오래였다.
복싱장과의 첫 만남은 제법 어색하고 낯설었다. 대형 프라자의 지하 1층에 있었는데, 평소에 다니던 헬스장이나 필라테스와는 입구부터 느낌이 달랐다. 지금까지 너무 고급진 곳에서 운동을 해왔던게 분명하다. 허름한 복싱장 문을 열자마자 확 땀냄새가 풍겨와서 발을 내딛기도 전에 약간 기가 죽었다. 운동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퍽퍽 샌드백을 치며 울려퍼지는 소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였다.
어물쩡 거리며 들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포스의 관장님이 우릴 맞아주셨다.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면 분명 '다음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하고 포기했을 법 한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세 명이었고 저렴한 비용에 놀라며 한달 운동권을 끊었다. 놀라운 건 두번째 방문부터는 땀냄새가 그닥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거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
복싱장에 들어오면 줄넘기로 하루 운동을 시작한다. 복싱장은 무조건 종소리에 맞춰서 운동이 진행된다. 띵! 하고 종소리가 울리면 줄넘기를 시작하고, 3분이 지난 후 다시 띵!하고 종소리가 울리면 30초 동안 쉰다. 소리에 맞춰서 줄넘기를 3세트 반복하면 본격 복싱에 들어간다. 줄넘기는 초등학교 이후에 오래간만에 했다. 욕심이 생겨서 열심히 뛰었더니 발바닥이 아려왔다. 뭐든 갑자기 무리하면 탈이 난다.
복싱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손에 붕대를 감는다. 천을 손에 감는 일이 뭐가 어려울까 싶었지만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꽤 버벅 거린다. 이 틈에 줄넘기로 집나간 넋을 다시 소환한다. 붕대를 다 감으면 관장님의 지도에 맞춰 쉐도우 복싱을 한다. 남들이 보면 허공에 두팔을 허우적 거리는 모양일 텐데 관장님께서는 늘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주신다. 이 정도면 여자 상위 10%라는 말도 해주셨다. 초보자에게는 칭찬이 진심으로 들린다. 이렇게 다음달도 등록을 하게 되고.
눈 앞에 대고 열심히 주먹질을 하고 나면 샌드백 차례다. 무겁고 딱딱한 물체에 온 힘을 실어 때릴 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린다-고들 말하던데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팔과 다리의 자세에 신경쓰랴, 펀치를 뻗느랴 정신없고 힘들다. 초보 복서는 돌아가는 앞발을 땅바닥에 고정시키고 상체의 회전력을 이용해 주먹에 파워를 담는 일이 아직 어렵다. 샌드백 치는 소리가 좀 경쾌하게 날라치면 여지없이 폼이 무너져 있다. 적어도 6개월은 연습해야 제대로 칠 수 있다는 코치님의 말씀이 있었다.
복싱은 상체 근력이 약한 여자에게 딱 좋은 운동이다. 체육관 안의 운동 기구들도 주로 상체를 단련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계속해서 쓰다 보면 근육이 늘기 마련이다. 복싱을 시작한지 몇 주가 안 지나서 아직 큰 변화는 체감하지 못했다. 느릿느릿한 신체 변화와 달리 머릿속엔 이미 배우 이시영님 같은 멋진 상체 근육을 가진 복싱 선수가 뛰어 놀고 있다.
운동을 하고 나니 활력이 돈다. 체육관에서 샌드백 치느라 기운을 다 써도, 운동을 안하고 바로 퇴근 했을 때보다 저녁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낸다. 누워 있으면 한없이 기력이 떨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몸을 움직이는 일과 멀었던 지난 몇 주가 그랬다. 퇴근하면 일단 누워서 한숨 자야 저녁밥을 할 기운이 생겼다. 지금은 다르다. 복싱이 끝난 후 느껴지는 개운함, 몸 안에 도는 생기,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듯한 뿌듯함이 오늘도 체육관에 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