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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와 핫도그 Oct 04. 2020

돈 주고 만든 체력이 내게 남긴 것들

PT를 100회 받으면 이렇게 변한다

"제가 본 아이 중에서 이렇게 뻣뻣한 아이는 처음이에요."


8살 때 내가 다닌 발레학원의 선생님이 말했다. 마음의 상처를 단단히 받은 나는 그때 이후로 더욱 운동을 멀리하고, 중학교 체력 검사에서 마른 비만 진단을 받는 청소년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중고등학교 모두 대체로 시험공부를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대한민국 수험생의 친구 '척추 측만증'과 함께 대학생이 되었다. 20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스포츠를 즐겨본 적이 드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운동을 한다는 건 인생에서 생각보다 중요하다.


20대 초반의 나에게 운동은 다이어트를 위한 수단이었다. '여자는 근육이 울퉁불퉁하면 안 돼요.' '여자는 힙업이지' '근육 우락부락하게 되지 않게 잘 가르쳐드릴게요' 같은 이야기를 하는 PT선생님에게 받는 헬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연히 운동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헬스 PT가 끝난 이후 운동과 멀어졌다.


직장인이 되고, 다시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0대 초반의 마르기 위한 다이어트 말고 진짜 나의 체력을 위한 운동이 필요했다. 슬슬 주변에 아픈 사람을 보면 내 건강이 걱정되기도 하고 더 이상 죽어라 술을 마실 나이도 지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 어느 날 나는 K와 함께 PT에 등록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헬스장 중에서 운 좋게 2명 특가로 PT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재테크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출을 통제하던 시기였는데 과감하게 건강에는 돈을 투자하기로 했다. PT선생님이 운동의 목표가 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얼마 전 본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의 맥켄지 데이비스 같은 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속 그레이스 역을 맡은 멕켄지 데이비스는 이렇게 생겼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맥켄지 데이비스. 정말 멋있다.

 

그렇게 맨몸으로 스쿼트 30개, 레그 프레스 40KG를 밀며 나의 PT가 시작되었다. 눈을 뜨고 보니 벌써 PT 100회를 받았고 맥켄지 데이비스처럼 근육질의 몸은 되지 못했다. (됐다면 좋겠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K와 나는 먹을 것 다 먹고,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 PT 받는 날에 운동에 충실했다. 온몸이 근육질에 쇠사슬을 휘두를 수 있는 강철 인간은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변화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일단 K는 마지막 PT에서 레그 프레스를 100KG까지 밀었다. K는 원래 나에 비해 운동신경이 뛰어나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PT를 받을수록 웨이트를 드는 무게가 쑥쑥 올라갔다. (K는 스키 강사이기도 하다.) 반면 어릴 적부터 체육과 담을 쌓아온 나는 K만큼 쑥쑥 무게를 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PT날 레그 프레스 80KG까지 성공했다. 이제는 장을 보고 무거운 생수를 거뜬히 들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생겼다. 하루 종일 등산을 해도 다음날 몸살이 나지 않는다.




 PT 100회가 나에게 남긴 것들이다. 첫째, 스트레칭 자세들과 친해졌다. 이제는 폼롤러와 요가매트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등산을 하고 나서,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하기 전 등 일상에서 틈틈이 스트레칭을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스트레칭 자세를 정확하게 연습할 수 있다는 건 어깨 결림, 허리 통증에서 해방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K는 허리 디스크로 고생을 했었는데, 매일 허리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 이후 통증에서 해방됐다.


북한산 원효봉은 고양이의 천국이다

둘째, 등산인이 되었다. 등산이라면 학을 떼던 내가 가성비 운동을 찾아 헤매다 등산에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이게 다 돈 주고 만든 체력 덕분이다. 처음에는 북한산의 원효봉, 그리고 더 험한 코스인 백운대를 정복하고 이제는 조선 팔도 다양한 산들을 돌아다니는 게 목표다. 실제로 K는 PT를 받기 전에 동네 뒷산에 오르고 나서도 온 몸에 힘이 빠졌는데, PT 후 등산인이 되고 나서는 5시간이 걸리는 등산을 하고 난 다음날에도 근육통 없이 하루를 보낸다. 등산은 하루 종일 운동을 해도 무료(!)인 데다가, 헬스장의 러닝머신에 비해 훨씬 다채로운 뷰를 감상할 수 있다. 63 빌딩 꼭대기에서 비싼 돈을 내고 볼 수 있는 뷰를 등산에서는 공짜로 누릴 수 있다.


셋째, 몸 쓰는 일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변화인데, PT를 받으며 몸 쓰는 방법을 알아가다 보니 신체활동에 더 즐겁게 임할 수 있게 됐다. 등산을 다니고, 배드민턴을 치고, 조깅을 한다. 얼마 전 추석 연휴에 오빠와 배드민턴을 치는 나를 본 엄마는 "네가 이렇게 배드민턴을 잘 쳤니?!" 하고 몹시 놀라셨다. 돈으로 산 체력은 엄마도 놀라게 한다. 운동의 장점은 끝이 없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을 타파하는데도 운동이 최고다. 늘 달고 살았던 어깨 결림과 두통도 없애준 만병통치약이기도 하다.



뻣뻣한 8살에서 돈 주고 산 체력을 장착한 28살이 되기까지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그리는 여성과 운동에 대한 이미지도 훨씬 다양해졌다. 내일부터 운동 뚱의 모든 운동을 다 잘하는 만능 캐 민경 장군, 캡틴 마블 영화에서 용감하게 다시 일어나는 브리 라슨, 터미네이터 영화 속 쇠사슬을 휘두르는 맥켄지 데이비스 등 여성들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 '애플힙'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위해서다.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얼마 전 타계하신 미국의 87세 최고령 대법관 긴즈버그의 퍼스널 트레이너가 낸 근력 운동 매뉴얼 책의 제목이다. 긴즈버그는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 2018년 폐암을 선고받으면서도 꾸준히 근력운동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운동이 건강에 중요하다는 거다. 올해 나이 58세의 어머니께서도 지난주 생애 첫 PT를 받기 시작했다. 엄마의 PT선생님은 과격한 운동보다는 팔 굽혀 펴기 10개, 풀업 10개처럼 단순하고 쉬운 동작들로 운동 루틴을 짜주셨다고 한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건강한 몸을 위한 운동은 인생에서 필수다.  주고  체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Written by. 토핫(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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