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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와 핫도그 Oct 06. 2020

종이책 흥선대원군에서 벗어나기

종이책 너머에서 발견한 독서의 신세계

"책은 당연히 종이로 읽어야지. 이북 같은 걸로 읽으면 집중이 안돼."


이북 리더기를 새로 산 L이 기계의 장점을 늘어놓는데 내가 넌씨눈처럼 응수했다. L이나 나나 책을 좋아하는 건 매한가지인데 L이 리더기를 샀다는 게 배신처럼 느껴졌다. 평생 종이책 읽으면서 같이 하하호호 할 줄 알았더니 네가 기어코 기계의 세계로 떠나는구나. 나는 평생 여기에 남아서 종이책과 함께 책 세계를 지키겠다!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L의 리더기를 보는 내 마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그 중에서 종이 책 매니아들에게는 자부심과 고집이 있다. 종이책이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 느껴지는 손맛이 있고, 모은 책이 쌓여서 벽면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뿌듯해서 밥 안먹어도 배부르며, 어느 장소에서나 책을 펼치고 앉아있기만 해도 감성이 마구 느껴진다. 어떻게 종이로 된 책과 비슷하게 흉내낸 걸 비교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바로 극렬한 종이책 애호가이자, 종이책 흥선대원군이었다. 책에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페이지 마커를 덕지 덕지 붙여가며 읽어야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읽으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도 어려웠다. 새 책과 헌 책을 골고루 사서 방 한켠을 책으로 쌓기 시작했다. 책장이 다 차면 새로운 책장을 샀다. 알바를 하던 대학생 시절에도 책 사는 비용은 아까지 않았다. 


대학생 때 사서 모은 책들. 책장에 자리가 없어 겹쳐서 꽂았다. 나중에 방 전체가 책이 된 건 사진조차 남지 않았다.


이렇게 책을 모은지 십 년이 넘어가자 책이 방 하나 전체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천권이 될 때 까지는 책 리스트를 간간히 작성했다. 천권이 넘어가자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책 목록을 작성하는 것도 귀찮아서 포기했다. 집에 무슨 책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책이 살고 있는 집을 만드는게 목표였다. 현관 문을 열면 빽빽한 책들이 보이는 그런 집. 서재와 집 일체화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중이었다. 이사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2년에 한번씩 이사할 때 약간의 짐이었던 책이 어느샌가 이사 비용에서 큰 부분이 되었다. 이사업체에서 견적을 내러왔는데 방 하나가 책으로 가득 찬 걸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사 비용 만큼이나 집에 공간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였다. 책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만큼 집 크기도 같이 커지면 참 좋으련만 계속해서 집 평수를 늘릴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이북리더기를 장만하기로 했다. 기계로 책 읽기에 거부감이 있던 나에게는 큰 결심이었다. 가끔 논문 정도는 아이패드나 컴퓨터로 읽으려는 시도를 해봤다가 결국 그것들을 인쇄해서 줄치면서 읽었다. 한 평생 종이로만 글자를 읽었는데 과연 책을 흉내낸 기계로 활자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종이책 흥선대원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이북으로 책을 잘 읽고 있다.



네,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종이책에서 벗어나니까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려있었다. 이북리더기로 책 읽는 게 편안해지면서 핸드폰과 아이패드, 컴퓨터로까지 책을 읽는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활자를 접하게 되었다. 정말 애니타임 애니웨어다. 오늘은 어깨에 충격파 치료를 받으면서 핸드폰으로 <십분의 일을 냅니다>를 다 읽었다. 책을 안 읽었으면 커뮤니티를 하면서 시간을 죽였을 거다. 컴퓨터로는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들을 주로 읽는다. 아이패드는 만화책 볼 때, 이북 리더기는 여행갈 때 애용한다. 


책에 직접 줄치고 메모하던 습관도 다른 매체로 읽으면서 더 정교화되었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줄치고 메모한 걸 노트에 정리해서 필요할 때마다 노트를 뒤져서 찾았어야 했다. 기계를 쓰는 요즘엔 책을 읽으면서 찾은 중요한 내용이나 생각들을 바로 컴퓨터에 정리한다. 이렇게 정리한 내용을 따로 인쇄해서 메모한 내용들만 다시 읽는다. 독서와 기계를 연결하면서 독서가 한 단계 진화한 걸 느낀다.


정리한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독서가 한층 깊어졌다. 지금까지 노트에 적어놓은 책들도 pc로 옮기는 중이다.


페이스북에서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으로 작품을 선공개 하는 작가들을 비난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작가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전자책에 대한 분노에 가까웠다. '전자책은 가짜고 종이책이 진짜다'. 나도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에 화를 내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평생 종이로 책을 읽어왔는데 어떻게 다른 매체로 책을 읽겠다는 거지? 


흥선대원군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여전히 종이책을 읽긴 하지만 주로 전자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평생 이북 리더기를 들고 다니지 않을까 싶다. 눈이 침침해지는 시기가 와도 전자책은 활자 크기를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어서 걱정이 없다. 전자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이번엔 얼리어답터처럼 빠르게 도전할 거다. 기술의 발달이 주는 편리함을 한번 느끼니 고집도 자부심도 다 부질 없어졌다. 받아들이니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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