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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와 핫도그 Oct 13. 2020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

무연고 죽음으로 처리된 중년의 남자 A가 있었다. A는 쪽방 촌에서 죽은지 며칠이 지나고서야 악취 때문에 발견 되었다. 옆방 사람들은 참기 힘든 냄새 때문에 고생했지만 냄새마저 없었다면 시신이 더 늦게 발견되었을 거다. A 만큼이나 어렵게 살던 형제와 부모가 사체포기각서를 쓰면서 최종 무연고 시신 처리가 되었다.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떠난 삶이었다. 


A는 초등학교를 채 마치기 전에 공장에 취직해서 한 때 꼬박꼬박 돈을 벌었다. 밀리지 않고 월급을 주던 회사는 IMF 시절 망했다. 그냥 망했으면 좋았을텐데 사장들이 A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빚을 남기고 도망갔다. 남들만큼 성실하게 살아온 A에게 남은 건 신용불량이라는 딱지와 빚 독촉 뿐이었다.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쫓기다 부랑자로 전락한다. 이때부턴 병이 생겨도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고 노숙과 시설을 전전하게 된다.


A가 죽기 전 고향의 아버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A의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알았도 별 방법이 없었다. 아들과 함께 살면 아버지는 부양 의무자가 생겨서 기초 생활 수급자에서 탈락한다. 그 정도의 소득도 없다면 부자가 나란히 굶주리는 일만 남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로 돌려 보냈고 그것이 마지막 부자 상봉이었다. 


조지 오웰이 살펴 본 1930년대 영국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당시 영국 돈으로 10실링(현재 가치로 17.5파운드, 한화로 2만 6천원 정도)의 노령 연금을 받는 아버지는 자식과 한집에 살기 어려웠다. 아버지 연금 때문에 자식의 급여가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동거하는 아버지를 아들의 '하숙인'으로, 연금은 아들의 가외 소득인 '하숙비'로 간주하는 정책이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집에서 나온 노인은 갈 곳이 없으니 진짜 하숙집을 찾아간다. 하숙집 주인에게 자신의 연금과 생사여탈을 맡긴다.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났다 하더라도 집에서 부양 받는 것 만큼의 주거의 청결과 음식의 영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인을 입주 받아서 생계를 꾸려가는 하숙집 주인 또한 노인 만큼이나 가난한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가난의 모습은 20세기 영국과 1세기를 지난 오늘날 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이 묘사한 풍경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쪽방촌의 열악한 환경은 몹시 닮아있다. 빈곤선 이하의 가난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와닿지 않는 문제다. 글과 영상으로만 배워놔서 눈에서 멀어지면 자꾸 마음에서 멀어진다. 존재하지만 보이지지 않게 비가시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잊으면 어김없이 내 안의 속물 근성이 튀어나온다.



요즘 살짝 신이 나 있었다. 작년에 주식 투자를 처음 시작하고 올해 코로나를 겪으면서 운 좋게 대세 상승기를 만났다. 남들과 비교하면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지만 잃지 않고 버는 투자를 했다. 초보에게 시작점에서 돈을 버는 경험은 꾸준히 투자해 나갈 용기를 준다. 그렇게 마냥 즐겁고 해맑게 지내던 중이었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잘 안듣는데 그날 따라 시동을 걸자마자 라디오가 켜졌다. 


차 스피커에서는 시끄럽고 유쾌한 컬투쇼 사연이 흘러나왔다. 길에서 할머니가 자기 키보다 큰 폐휴지 리어카를 끌고 가는 걸 본 청취자가 할머니를 도와드린 내용이었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사연이었는데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할머니의 키보다 큰 폐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할머니는 그렇게 일 하시면 하루에 얼마를 벌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덕분에 사연의 뒷 내용은 듣지 못했다.


할머니 리어카에 쌓인 폐지가 이만큼이었을까.


이번에 공모주 청약으로 벌기를 기대하는 금액이 어쩌면 할머니가 한달 내내 열심히 폐지를 모아서 판돈과 비슷하거나 높은 확률로 그것보다 많을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앉아서 클릭 몇 번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무거운 무게를 지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자본금? 정보? 지식? 


세 가지 모두 가지지 못한 할머니는 돈이 돈을 버는 판에 끼지 못한다. 남은 건 노동으로 돈을 버는 세계. 이곳에선 정년이란 없다.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리어카를 끌 힘이 없어지는 순간이 되고서야 리어카를 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라에서 마련한 복지는 용케 이런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우리 눈에 잘 띄는 곳으로 나온다.


몇 년 전 송파에 살던 어머니와 두 딸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후에 발견된 가계부와 메모. 이 사진들은 언제나 눈물 버튼이다.


S와 처음 재테크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눈 이야기가 있다. 투자로 100만원을 벌면 적어도 3만원은 어딘가에 후원하거나 기부하고 싶다고. 당시에는 투자는 커녕 적금조차 없던 시절이라 막 던진 말이었다. 그 뒤로 완전히 까먹었다가 다시 기억났다. 후원처를 찾으면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되새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내 안의 탐욕. 


written by 토핫 (핫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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