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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와 핫도그 Nov 07. 2020

술을 끊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알콜 중독에서 벗어났다

맥주 한 잔에 추억과
소주 두 잔에 진상과
위스키 세 잔에 필름 끊김



나는 알콜중독이었다. 365일 중에 360일을 술과 함께 보냈다. 남은 5일은 극한의 숙취에 시달리며 이불과 합체하느라 술을 마시지 못한 날들이다. 술 마시자는 제안은 당일 1시간 전에 연락이 와도 뛰쳐나갔고, 발등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절뚝거리며 광역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에 술 마시러 갔다. 매일 마셔도 술자리는 늘 설렜으니 중증이었다.


술자리에 도착하면 안주가 뭐든 간에 첫잔은 소맥이었다. 맥주 3: 소주 1이면 시원하고 달큰한 소맥이 완성되었다. 자주 가던 곱창집에서는 과냉각시킨 맥주잔을 제공했다. 거기에 맥주를 따르면 첫잔에 살얼음이 생겼다. 얇게 얼음이 서린 맥주에 소주를 한잔을 따르면 박수가 절로 나왔다. 데려간 친구들 모두 탄성을 내며 원샷했다. 그렇게 마시다 취하면 주종을 가리지 않고 퍼부었다.


중증 알콜 중독자였지만 사회에서 ‘젊은’ ‘여성’ 알콜중독자는 귀엽게 봐주는 편이었다. 만취해서 크게 진상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커지는 것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라고 자위하지만 실제로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진상을 부렸다. 만취해서 직장 동료의 손등을 핥았고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K씨 그땐 미안했어요), 화장실 간다고 사라져서 길에서 잠들거나, 말 없이 귀가 해서 지인들의 원성과 걱정을 한몸에 들었다.


술을 완전히 끊은지 1년 3개월, 일수로 따지면 458일이 되었다. 그전까지 금주하려고 10번도 넘게 시도했다가 매번 대실패했다. 금주 선언하고 폭음하는 일이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술 끊겠다고 선언해도 친구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술자리 사진을 올리면서 이번에야 말로 탈 알코올 하겠습니다! 하는데 누가 믿어주겠는가. 싸이월드, 페이스북에는 지난 날에 실패한 금주 선언들이 아직 남아있다.


이번엔 다르다. 확실하게 술을 끊었다. 이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는 술 마시고 싶은 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두 번 정도는 술 생각 난 적이 있기에 '거의'라고 했다) 삶의 선택지 가운데 술이 사라진 느낌이다. 금주에 실패했을 때는 간신히 참다가 폭발해서 술을 들이붓는 패턴이 반복됐다. 이제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으니 참을 일도 없다. 가끔 술자리 분위기를 내고 싶으면 무알콜 맥주를 마신다. 무알콜이지만 알콜 느낌적인 느낌은 충분하다.


술을 멀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술독에 빠져살던 친구 S가 술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금주를 권했다. 당시의 나는 금주는 포기하고 대안으로 절주 계획을 세웠다. 한번 마시면 들이 붓는 수준으로 마시니 자제하기 힘들었다. 절주는 글자로만 존재하는 단어였다. 친구의 제안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고 금주를 시작했다. 혼자 시도했으면 도로아미타불이었을텐데 술 메이트가 술을 끊겠다고 하니 친구따라 강남가게 되었다.


그렇게 술을 끊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겼다

 

술을 끊고 나서 비로소 음식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 술 자리가 있을 때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맛집을 찾아 다녔다. 기껏 맛있는 음식을 시켜 놓고 만취하니 음식 맛을 기억하지 못했다. 술 자리 초반에는 안주를 거의 안 먹다가 만취하면 그제서야 안주빨을 세우는 타입이었다. 비싸고 맛있는 걸 먹긴 먹었는데 무슨 맛인지 모르고, 유명한 음식점에 간 것까진 기억하는데 거기 음식 맛이 어땠는지는 모르니 엉망진창이었다.


금주한 뒤에 자주 가던 횟집을 다시 찾았는데 회가 너무 맛있어서 소오름이 돋았다. 술 먹을 때는 뭘 먹든 술 맛만 났다. 술 없이 먹으니 회가 입에서 춤을 췄다. 놀랄 노자였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그 횟집이 왜 맛집인지,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는지 추천해줄 수 있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술을 위주로 파는 맛집은 가기 어려워졌다. 대신에 술 없어도 되는 맛집을 다니며 음식 맛을 음미한다.


오래간만에 찾은 일식집. 용기를 내니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다!

(어제 술 마실 때는 자주 갔지만 최근에는 못가던 조그마한 일식집에 예약 전화를 걸었다. 술 안마시는데 가도 되냐고 문의했더니 6시 오픈 시간에 맞춰서 오면 가능하다고 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맛있는 스시와 일식을 먹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술 안마시는 걸로 눈치 보여서 못가던 맛집들을 가볼 용기가 생겼다.)


술을 안 마시니 저녁과 주말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드문 드문 하던 책 읽기와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요즘처럼 가열차게 책을 읽은 건 술을 끊은 작년 8월부터다. 올해는 더 열심히 읽어서 하루에 한 권 이상 책을 읽는 중이다. 앞으로 28년 동안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어 만 권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년 안되는 시간 동안 고작 400여 권의 책을 읽고 삶이 180도 달라졌다. 만 권이면 인생이 더 크게 바뀔 수 있을 거 같아 몹시 설렌다.


글쓰기도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글을 썼다. 별 거 아닌 글들이지만 쓰다 보니 생각을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돼서 꾸준히 쓴다. 덕분에 직업과 관련한 칼럼을 쓰게 되었다. 예전에 칼럼 제안을 받았으면 바로 거절했을텐데 쓰기가 놀이처럼 느껴지는 상황이라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삶의 방향이 바뀌면서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술을 멀리하자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차례 정리되었다. 자주 만나던 주당들과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취하면 쉽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빠르게 누군가와 친해졌다. 술이 만들어준 절친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은 술이란 매개가 없어지고 서서히 멀어졌다. 대신에 술 없이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남았다. 어떤 친구가 더 좋고 나쁘냐의 문제는 아니다. 상황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뿐이다. 술이 없으면 주변 친구들이 모두 떠나갈 거란 걱정이 있었는데 기우였다. 앞으로도 술을 멀리하는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을까.


알콜 중독일 땐 등한시 하던 건강이 금주 후에는 커다랗게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술 마실 때마다 매번 필름이 끊겼는데 애써 무시했었다. 그대로 뒀으면 살면서 어느 날에는 알콜성 치매가 왔을 일이다. 운동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몸에 좋은 식재료로 요리를 해먹는 즐거움이 술이 주는 기쁨보다 커졌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written by 토핫 (핫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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