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살인지 열세살인지 모를 무렵의 일이다. 부모님이 없는 저녁이었다. 동생과 밥을 먹고 둘이 앉아 티비를 보는데 핫케이크 굽는 방법이 나왔다. 핫케잌 믹스를 반죽해 적당량을 덜어내서 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끝이라고 했다. 빵에 취미가 없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당시에 접했던 빵이라고는 집 앞 빵집의 사라다빵, 소세지빵, 식빵이 거의 전부였다. 화면 너머의 핫케이크라는 게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했다. 네모 상자 속 출연자는 핫케잌에 잼과 시럽을 곁들여서 야무지게 먹었다.
티비에서 빵 냄새가 날리 만무했지만, 이미 내 코끝에선 상상의 고소한 빵 냄새가 맴돌았다. 가끔 빵 집 앞을 지날 때 나던 그 향기. 핫케잌에서 그런 향기가 나는 게 아닐까. 요리라고는 가끔 라면이나 끓이던 초등학생에게 티비의 쿡방은 핫케잌에 도전할 용기를 불어 넣었다.
"어디서 맛있는 냄새 안나?"
"안 나."
"아무래도 안되겠어. 우리도 만들어 먹자."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이는 유치원생 동생을 꼬드겼다. 이런 일은 같이 도모해야 제 맛이니까. 혹시 잘못되더라도 나만 혼나면 섭섭할테니 동생도 가담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유딩은 초딩의 제안에 바로 화답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핫케이크 만들기. 집에 딸기잼과 꿀이 있으니 완성되면 그걸 찍어 먹자고 히히덕 거리며 야심차게 요리 재료를 꺼냈다.
우리의 핫케이크는 애초에 망할 수순이었다. 핫케잌 믹스 대신 중력분 밀가루를 썼기 때문이다! 유초딩에게 핫케잌 믹스를 사러갈 돈이나 머리는 없었다. 밀가루랑 핫케이크 가루가 비슷하니까 완성품이 얼추 비슷하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설탕, 계란을 넣고 열심히 반죽하다가 후라이팬이 아닌 냄비에 덩어리를 투하했다. 한참 가열해도 타는 냄새가 날뿐 별다른 변화가 없어서 가스불을 껐다.
덩어리를 뒤집으면서 본 건 아까 영상으로 봤던 핫케이크와 비주얼이 상당히 달랐다. 핫케잌은 만들기 쉬우니까 이것도 무조건 맛있을 거란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두 사람이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렸다. 결과는 쫜득거리는 밀가루 덩어리와 밑이 탄 냄비였다. 누가 먼저 시식할 것인지를 두고 동생과 기싸움을 벌이다가 내가 졌다. 아무래도 만들자고 한 사람이 먼저 먹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덩어리를 떼어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탄식.
빵이라고는 절대 칭할 수 없고, 음식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원재료의 맛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자연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설탕, 밀가루, 계란이 전부 따로 노는 신개념 맛. 내 표정을 본 동생은 한사코 시식을 거절하다 만든 성의를 봐서라도 한입만 먹으라는 말에 못이겨 한입 먹고 바로 화를 냈다. 뒤에 탄 냄비를 발견한 부모님께 혼난 건 덤이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제가 빵을 안 좋아하게 된 게.
밀가루 빵에 크게 데인 뒤로 빵 종류는 내돈 내산 하지 않는 한식파 성인으로 자랐다. 1년 동안 빵을 먹은 횟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고, 친구랑 카페에 가도 조각 케이크 한 조각을 두고 고사 지내다가 결국 다 먹지 못하곤 했다. 누가 빵을 먹겠냐고 물으면 "저는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손사래쳤다. 빵과는 몸과 마음의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졌다.
평생 빵 굽는 일 같은 건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요즘 종종 고소한 빵 냄새가 집안을 싸악 감싼다. 빵을 안 좋아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주 스콘을 굽는다. 한 달에 세 네 번 정도. 에어프라이어로 굽는 야매 스콘 레시피를 발견한 다음부터 부지런히 굽는다. 처음보다 맛도 모양도 발전한 스콘을 보면 괜히 뿌듯하다. 반려인에게 스콘으로 인정 받았다.
빵을 안 좋아하던 사람에서 매주 스콘을 굽는 사람이 된 건 반복의 힘이다. 회사 앞에 분위기 좋은 스콘 전문 카페가 생긴 걸 동료에게 들었다. 가보니 음료와 스콘 맛이 괜찮고 가격이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했다. 홀린듯이 들러서 종종 책을 읽곤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어느 새 스콘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 자주 가기 어려워지면서 혈중 스콘 농도가 떨어지자 직접 스콘을 굽는 경지에 이르렀다.
반복이 인간의 욕망을 바꾼 실험도 있다. 영국의 한 기관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삶은 당근과 아티초크 퓌레(각종 과일과 야채를 삶아 곱게 갈아 만든 걸쭉한 음식)을 제공했다. 아이들이 안 좋아하는 음식을 자꾸 주는 걸로 입맛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당근과 퓌레를 제공 받은 아이들은 평균 30g을 먹었다. 이 정도면 소주잔 반 정도 되는 양이다. 거의 안 먹었다는 소리다.
첫회의 평균 섭취량에 굴하지 않고 15회 동안 점차 양을 늘려가며 제공한 결과 마지막에는 평균 140g을 먹었다. 유치원 아이들 몸무게가 20kg인 걸 감안하면 한끼 식사가 되는 양이다. 음식을 좋게 평가하거나, 유치원 교사가 직접 먹는 시범을 보이는 것 같은 다른 자극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꾸준히 그 음식에 노출됐을 뿐인데 아예 안 먹는 수준에서 식사 대용이 될 정도로 먹었다.
반복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입맛 뿐이 아니다. 몇 년 전까지 산에 오르는 게 너무 싫어서 회사 워크샵 산행을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까 매번 고민하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 뒤로 등산 열풍에 힘 입어 가끔 산에 오르다보니 야매 등산인이 되었다. 가끔이지만 내심 워크샵을 기다린다. 건강상의 문제로 중간에 포기한 수영도 이전까진 끔찍히 싫어했던 운동이었다. 몇 달 강습을 받고 난 뒤부터는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졌다. 그뒤론 다시 수영을 배울 날을 기다리게 됐다.
뭐든 자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좋아진다. 내년 새해 계획을 세울 땐 가볍고 소소하게 자주 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보자. 반복으로 욕망이 바뀌면 이전에 없던 삶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올해엔 스콘 굽기였고, 내년에는 또 뭐가 될지 궁금하다.
*영국 유치원 아이들의 10%는 끝끝내 퓌레와 당근을 거부했다. 반복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분야도 있다.
에어프라이어 야매 스콘 레시피
준비물 : 핫케이크나 비스켓 가루 180g, 밀가루(중력분도 무관) 40g, 계란 1알, 우유 40ml, 버터 20-30g
- 이 정도 준비물이면 스콘이 크게 4조각 나온다.
1. 준비한 핫케잌 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체에 친다.
2. 버터를 듬성 듬성 덩어리지게 잘라서 넣는다.
3. 우유와 계란을 섞은 물로 가루를 반죽한다. (스콘에 바를 양을 남긴다. 20g 정도)
- 반죽할 때는 한번에 모든 물을 넣지 말고 조금씩 넣는다.
- 반죽은 수제비 만들 때처럼 열과 성을 다해 하지 말고 주걱 같은 걸로 # 을 그리듯이 슬렁슬렁 한다.
4. 대충 뭉쳐지는 느낌이 들면 반죽을 멈춘다.
- 계란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반죽이 질어졌으면 가루를 조금 더 넣는다. 밀가루도 무관!
5. 랩으로 동그랗게 싸서 냉장고에 30분간 둔다.
6. 30분 뒤에 꺼내서 칼로 4등분 한 뒤 남은 계란물을 겉에 바른다.
7. 에어프라이어에서 160도 10분, 뒤집어서 10분 굽는다.
8. 완성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여느 빵집이 부럽지 않다!
written by 토핫 (핫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