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존중의 시작

퇴사할 결심,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았다.

by megedi

나는 심리학 책을 수도 없이 읽었고, 자기 계발서를 좋아했고,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꽤 인격적인 사람인 척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겉으로 포장된 '똑똑함'에 더 가까웠다. 머리로 이해한 지혜를 삶 속에서 체화하지 못한 채, 그저 아는 척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퇴사를 하며 유독 억울했다. 나는 성장하는 사람이고, 내가 알아낸 지혜와 지식을 사회생활에 잘 적용했다고 믿었으니까. 물론 마지막 회사는 유독 사람들이 미성숙한 환경이기도 했다. 회사 내 관계와 구조 모두가 버거운 곳이었다. 그리고 단편적인 지식과 지혜, 그리고 아직 서른 어디쯤에 걸쳐진 나의 경험은 그런 회사에서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데이터를 갖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나의 매일은 일보다는 관계 속에서 찔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퇴사할 결심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참으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인정하고 알아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모두 합치면, 회사를 다닌 2년의 곱절하고도 곱절이라 할 만큼, 숨 막히는 무게였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괴로움 속에서 발견한 하나의 감정. 그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니, 내 모든 부끄럽고 억울하고 화나고 슬프고 때로는 행복했던 삶을 돌아봐야 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왜 나만 이렇게 예민하게 느껴질까. 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존버가 성숙한 건 아니었다


사실 입사 후 내 MBTI는 'JONBER'가 됐다.

직장인이라 함은 '참을 인(忍)' 세 번과 '나이, 잔고, 경력'이라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이 지독한 인내심을 '사회적 성숙'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낳은 인내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것은 그다지 성숙한 자세가 아니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이곳은 야생의 짐승들이 빙의된 장소인가?'와 같은 분노의 허리케인이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것을 꼭꼭 숨기며,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몇 번이나 멘탈을 다시 부여잡고, 짧은 시간에 수많은 번아웃이 오고.

기어코 회사 사람들은 꿈에서도 스멀스멀 나타나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기를 수십 번.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럼에도 견뎌야지, 어른의 자세란 그런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런 환경에 나를 계속 두는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침범하고 인격적이지 않은 문화가 만연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퇴행을 하고 있는 상사의 무능함은 둘째 치고,

더 이상 참고 관망하다 얻어맞고 집에 와 씩씩거리면서 남편에게 화풀이나 하는, 비겁한 존버는 나와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을 위해 그만둬야 했다. 진짜 성숙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던 퉤! 사(死)를 했다.



그래도 나는 나였다


퇴사를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성숙한 척, 우아한 척하는 친절은 애초에 던져버리고 박쥐와 여우의 그 어딘가를 연기했다면, 퇴사 후에도 악몽에 시달리는 억울함은 없었을까?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더 아팠던 것이다.


퇴사 전, 하루에도 수백 번 ‘언제쯤 이 말을 뱉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존버의 시간을 견뎌내던 그 처절한 밤들은 이제 지나갔다. 피눈물 흘리며 버티던 고통도 흐르는 시간 속에 차츰 희미해졌고, 퇴사 후에는 또 다른 고민과 ‘걱정인형’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몇 번을 되뇌어도 퇴사하길 참 잘했다는 확신뿐이다.

설령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자리에 선다 해도, 내 이익을 위해 박쥐처럼 비겁해지거나 여우처럼 교활하게 연기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분명하다.

이제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나를 존중하기 위한 말을 훨씬 더 용기 있게 건넬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퇴사를 결심한 순간, 나는 우물 안의 두려움에 머무는 대신 나 자신을 향한 존중을 선택하기로 했다.

퇴사만 하면 모든 게 선명해질 줄 알았지만, 때로는 미련하게 지난 감정을 곱씹는 '되새김질'이라는 복병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조차 괜찮다.

이제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을 실전으로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내게 가장 값진 선물은 '쫓기지 않는 시간'과 '자연이 느껴지는 우리 집 거실'이다.

문득 불안이 밀려올 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는 말씀을 나침반 삼아 마음을 다잡는다.

조직의 틀에 눌려있던 고유한 달란트를 조금씩 피워내고, 비워진 마음의 자리에 소담 소담 사랑이 채워진다. 소란스럽던 마음속 수다쟁이도 어느덧 고요해진다. 삶의 결이 선명해질수록 공허함을 채우던 ‘홧김 비용’의 유혹마저 단정한 절제 아래 다스려진다.


결국 퇴사는 마침표가 아니라, 진짜 나를 발견해 가는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여전히 흔들리는 날도 있겠지만 이제는 나를 믿는다.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고, 나에게 한없이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감사를 담아, 퇴사 후 마주한 이 소중한 계절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