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영화 기생충을 본지는 꽤 됐다. 그런데 왜 이제야 리뷰를 쓰냐 묻는다면 오랜만에 한국 영화사에 길이 기억될 작품을 좀 더 나만의 방식으로 오랫동안 끌어안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드러내고자 한 메시지뿐 아니라 그것을 봉준호 감독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랜만이기도, 매우 완성적인 데다 감각적이기까지 했다. 장 그르니에가 카뮈의 소설을 읽기 아까워했다는 것처럼(제법 거창한 비유이지만) 나는 이 리뷰를 토해내기까지 기생충을 매우 나만의 작품으로 지니고 싶었다. 내가 극 중 이름이 아닌 송강호라는 배우 본명을 사용하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다. 송강호는 정말 기생충 그 자체다.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마더처럼 연출, 촬영, 연기, 미술, 음악이 등을 완벽하다는 수식어를 또다시 얻게 됐다. 봉준호 감독이 사랑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어렵지가 않다. 상황에 대한 설명과 감정선의 전달이 참 친절하다. 두 번째는 스타일이 있는 웃음 포인트다. 배우 송강호와 만나면 더욱 그러한데, 그저 그렇게 툭 던지는 요상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명대사가 되고 영화의 핵심이 된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어차피 계획을 세워봤자 뭐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송강호의 처연한 말. 나의 개인적 신조인 'Do Plan'의 근본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포스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미스터리 한 대 저택 앞, 사람들은 가장 먼저 송강호의 얼굴에 시선이 간다. 우린 그가 배우 송강호라는 것을 알지만, 눈은 검은 테이프로 가려져 마치 신변 보호가 필요한 듯하다. 송강호를 지나 관객의 시선은 상반신은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다리로 이동한다. 죽었는지 자는 건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포스터는 신변과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인데, 계급에 집중한 봉준호의 의도와 아이러니하게 맞아떨어져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눈을 가리는 아이디어는 봉준호 감독의 것이 아니라 포스터 크리에이터가 직접 작업한 것이라는 것도 놀랍다. 감독의 의도를 넘어 또 다른 해석의 단계를 만들어 낸 그의 위트는 유행처럼 번져 자연스레 영화 홍보로 이어졌다. 계획과 무계획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영화 기생충, 포스터 그리고 봉준호 감독. 마치 무심한 듯 입은 패션 룩이 모두 짜여진 계획이었듯, 봉준호 감독은 감각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 느낌을 따라 철저히 계획을 세운 듯하다.
당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감하는 웃음
피자 박스 접기, 대만 카스타드 사업, 택시 운전 등 상위 층은 결코 알 수 없는 중산층 그 아래의 삶. 반 지하에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의 집이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보는 위치라는 것을. 그 사람들이 버리는 담배와 아무렇지 않게 뱉는 침이 내 창문 풍경으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삶이라는 것을. 비가 와도 방수 텐트에서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상위층의 자녀를 거실에서 지켜보며 섹스를 하는 부부의 모습과 목까지 차오르는 물을 퍼내다 못해 거꾸로 치솟는 변기 물을 막고 뚜껑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유. 관객은 이 두 상황 중 어딘가에 자신의 수준을 대입하며, 공감하고 고소(苦笑)를 지었을 것이다.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라고. 누가 승자의 삶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지하의 삶이 지상의 삶에게 반격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가난과 부의 넘나듦은 살인을 한다고 해서 가능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부를 가진 삶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존재처럼 보이는 듯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영화의 제목은 기생충이다. 자, 집에 숨어 사는 바퀴벌레를 생각해보자. 밤이나 사람이 없는 낮에도 벌레는 집안 곳곳을 활보하며 음식물이나 사물을 지나다니는 것은 물론, 손길이 닿지 않는 아주 깊숙한 곳까지 헤매고 다닌다. 바퀴벌레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이 바보 같은 것이다. 퇴근 후 돌아온 사람이 불을 탁! 하고 켜는 순간 몸을 숨기고, 자신이 손댄, 이미 다 맛본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해보자. 영화 속 송강호가 바퀴벌레와 다를게 뭐였겠는가. 상위층이 자신의 계획대로 속아 넘어가는 모습에 처음에는 쾌감을 느끼고 오히려 자신이 우위에 선 듯한 기분을 잠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벌레로 태어난 이상 벌레로 살아야 한다.
기생충도 밟으면 꿈틀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탄한 포인트는 송강호의 감정선 변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갑작'스럽지만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초반부터 가족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어도 내색 안 하던 속없던 인간이 중반부에 아무도 없는 대 저택에서 가족끼리 몰래 술파티를 벌였을 때 부인이 송강호에게 벌레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씬이 나온다. 그때 순간적으로 테이블을 엎으며 화를 낸다. 이내 연기라고 하면서 너털웃음 짓지만 이는 송강호에게 자존심은 남아 있구나라는 것을 관객에게 은근하게 전한다. 이 인간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이 장면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밑거름이 되며, 이선균의 냄새 지적까지 더해지면서 송강호의 내면은 이미 주체가 안됐다. 그가 이선균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 ‘그래도 사랑하시죠?’. 이 대사는 송강호가 냄새가로 선을 넘기도 했지만 송강호는 심기도 건드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저택에 들어와서부터 이선균을 죽이기까지 송강호는 뚜렷하게 변한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상위층의 삶을 통해 깨달은 자신은 절대 벌레 신분에서 변하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 반지하에서 환기되지 않는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인생. 그러한 인생의 냄새가 자신을 벌레로 대변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친다. 이 과정을 봉준호 감독은 친절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충분히 심어두었다. 그리고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그의 피곤하고 처연한 한마디를 뒤로 한채 계획되지 않았던 살인을 저지른다. 놀랍지만 설득이 되는 죽임. 분명한 상위층의 삶을 곧 잘 따라 하던 하위층의 인간을 보여주는 앞의 내용과는 다르게 하위층이 저지르는 반격은 꽤 품위가 없다. 마치 계획된 잔인한 복수극처럼 보이는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벌레'에서 '세상이 모두 싫어하는 살인자'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난으로 피박받던 삶에서 더 내려가 전 국민이 혐오하는 살인자가 된 것. 그 살인 후 송강호는 완벽한 그 집의 기생충이 된다.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른다. 아들이 돈을 벌어서 아버지를 탈출시키는 희망 혹은 예상되는 미래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아들이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탈출시킬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다. 사실 불가능함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처참한 계급 사회의 실상을 앞서 보여줬기에 우리는 함부로 이 결말이 희망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과하게 꿈틀한 아버지는 자신을 진정한 기생충으로 만들었고 아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피자 박스 접기? 또 다른 저택에 들어가서 영어 과외? 그렇다면 결국 기생충의 아들 역시 기생충이 되는 셈 아닐까. 안타깝지만 한 번 태어난 벌레는 벌레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차라리 아버지처럼 무계획이 계획이라 믿으며 아직 한참 남은 비참함을 견디는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