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잘못 탈 준비
김연수 작가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여행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건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가 되는데, 이 젊은이란 사실 실제적인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깐.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밖에.”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가 있다면 사실 자신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영화 런치박스 역시 마찬가지다. 관객은 실패할지도 모를 여행에 대해 준비할 과정을 겪는 두 주인공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치환한다. 아 나도 런치박스 같은 우연의 상황에 빠져보고 싶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정말 잘못 탄 기차에서도, 실패할지도 모를 자신의 인생에서도, 얼마나 의연할 수 있는 가의 문제다.
일상을 흔드는 행복한 설렘
영화 런치박스는 잘못 배달된 도시락 통을 통해 두 남녀(사잔, 일라) 주인공이 갖는 설렘, 그리고 서로의 영향으로 인해 일상이 변해가는 과정이 주된 스토리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도 문화가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똑같은 루틴적 인생에 하나 둘 알게 되는 절망적 진실들, 그 속에서 우연히도 잘못 배달된 런치박스가 메마른 일상에 단비가 되어준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 그리고 런치박스 속 난 아래 숨겨진 편지를 통해 서로의 우주를 겹쳐가는 두 사람은 마치 새로운 여행을 떠나길 주저하는 인간상처럼 보인다.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이 시키는 대로 성실히 살아온 이들의 일탈이 과연 정답일지는 주인공도 관객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뭐 우리 인생이라고 다를까. 원치 않는 기차에 몸을 싣고 허망한 눈동자를 드리울 바에 잘못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 것. 그것이 쉽진 않겠지만, 사잔의 후배 셰이크처럼 4시 45분에 좀 늦더라도,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 같더라도 그가 영화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관객이 자연스레 알아간다.
음식을 통해 넓어지는 우주
김혜리 기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가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 간다." 주인공 사잔은 점심은 업체에서 받아서 먹고, 저녁은 혼자 집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다. 까칠하고 여지가 없는 성격 덕에 점식식사 역시 혼자 먹는다.(아무도 함께 먹어주지 않는다.) 돋보기 안경집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안경을 꼈다 뺐다를 반복하고 안쓸 때는 꼭 안경집에 보관하는 습관을 가진 그에게 갑작스러운 잘못 배달된 런치박스는 그의 단정하고 고지식한 삶에 기분 나쁘지 않은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아니다. 오히려 사막을 걷다 반짝이는 조개껍질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치다. 일란의 편지 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던가, 그녀의 이야기 속 실링 팬이 등장하면 자신도 천장을 바라보며 팬이 돌아가는 것을 한 참 바라보기도 한다. 사잔은 아내가 죽고 나서 누군가 정성을 다해 준비한 음식을 먹은 지도 오래됐고, 어떤 여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참 오랜만일 거다. 외롭고 비좁아졌던 사잔의 삶에 일란에 따뜻하고 끝내주는 음식과 소소한 일상이 마주하자 그는 점차 변해간다. 셰이크와 식사를 하게 되고, 길 건너 아이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가 생긴다. 부탄의 라디오를 들으며, 다리를 째깍째깍 움직이기도 하고 죽은 부인이 좋아했던 비디오를 다시 틀어보기도 한다. 그의 우주는 일란으로 인해 넓어졌다. 마치 꿈을 꾸는 소년처럼. 구름 위를 걷듯 배시시 웃는 일이 많아진다.
인도 여성의 삶 속에 피어난 사랑
인도는 일부다처제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나라다. 영화 속에서 일라의 남편이 외도를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크게 비판받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라의 감정적인 허망함은 그녀를 갈 곳 잃게 만든다. ‘왜 사는 걸까’ 일라는 사잔을 위해 음식을 만들다 중얼거린다. 자살한 모녀의 뉴스를 들으며 자신에게 대입해보기도 한다. 그녀는 사잔 편지에 부탄으로 남편의 외도 소식을 얘기하고, 부탄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평소에 윗집 의모에게 의지해사 레시피를 만들거나 남편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그녀의 삶은 주체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사잔이 함께 부탄으로 가자고 했을 때 과감히 카페에서 보자고 한 것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사잔의 사무실에 찾아가기까지. 그녀는 사잔으로 인해 어느새 사랑을 위해 못할 것이 없는 여성이 되었다.
인도 여성의 삶은 남편이 죽었을 때 이제야 배가 고프다고 말할 정도로 고되다. 그런 그녀가 행복을 찾아 주체적으로 기차를 잘못 타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잔의 존재와 그의 편지로 인한 것이다. 일란에게 사잔의 편지는 그녀를 단순히 인도 여성의 수동적인 삶에서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용기와 도전을 준 셈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찾아가는, 일란은 부탄에 떠날 준비를, 사잔이 일란을 찾아 수소문하는 모습으로 끝났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두 사람이 영화 속에서 만큼은 만나서는 안된다는 바람이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영화의 메시지가 파괴된다. 우리는 안제나 한 치 앞을 모를 여행자의 인생으로 산다. 우리가 내일, 한 달 뒤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지하철, 기차를 잘못 타 어디로 떠나게 될지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차를 잘못 탈 준비는 되었는지. 이 영화를 통해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여행 같은 선물을 받은 기분을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