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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Jun 21. 2019

영화 마미

We never born to mommy

영화 마미에 대한 이야기는 감독 자비에르 돌란(Xavier Dolan)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를 로렌스애니웨이로 첫눈에 반해 하트비트,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다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 마미가 국내에서 꽤 흥행을 거두고, 방구석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때쯤, 자비에르 돌란은 이미 세계 영화계에서 젊고 매력적인 데다 독보적인 영화 스타일로 최고 주가를 날리고 있었다. 자비에르 돌란 감독의 굉장한 마니아로 이 글을 적고 있다는 사실 조차 무척이나 설렌다. 영화 마미에는 정말 특별한 영화적 기술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연출력에서 나오는 어떤 경의로움의 순간이 다양하게 숨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본을 깨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일단 1:1 비율의 답답한 프레임, 배우가 프레임에 손을 데 직접 넓히는 초영화적 시도, 너무 사랑해서 서로 죽여버리고 싶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감각적인 포스터까지. 다른 영화에서 잘 건들지 않아 오래도록 화제가 됐던 요소들은 특별히 이 글에서 서술하지 않겠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논했으므로. 나는 이번 글에서 영화 마미가 보여주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하고자 한다.


Mommy와 스티브의 하이파이브

사실 엄마가 제목인 영화는 많다. 엄마, 마더Mother, 마미Mommy 등 호칭별로 영화는 계속 나와 왔지만, 마미는 어쩐지 다르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이거나 철없는 아이들이 보통 엄마를 마미라고 부른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일 거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마미'라고 엄마를 부를 때,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고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마미는 엄마와 아들의 숭고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캐나다의 자녀보호법이 바뀌었다는 내용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위함 역시 아니다. 엄마, 자식이기 전에 각자 하나의 인격체고, 소우주라는 인류적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디안과 스티브는 서로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가 없다. 사실 실제로 심신을 위협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엄마가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보다 엄마가 더 아들을 더 사랑한다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자유분방하고 당당하면서 매력적이고 속 깊은 엄마 디안. 오랜만에 사고뭉치 아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버스 안 엄마 무릎을 베고 풍선껌을 부는 스티브. 두 사람이 단순히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모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으로 스티브와 함께 헤처 나가야 할 미래를 바라보는 듯한 디안의 아득한 시선. 그렇지만 스티브의 머리칼을 넘기는 애정 어린 손길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쩐지 마음이 놓이게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헤쳐나가자는 파트너십을 다진 그들의 모습에는 오래된 연인 같기도, 부부 같기도 한 그들만의 사연이 담겨 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여리고 착하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에다 애착 장애까지 있는 스티브는 역시 집에 돌아오자 착하고도 나쁜 짓을 시작한다. 엄마를 위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Mommy라고 쓰여 있는 목걸이까지 선물한 것. 보통 엄마였으면 정말 아들의 사려 깊은 행동에 고마움을 표하겠지만, 이 집의 상황은 다르다. 욱하는 성격의 다인은 스티브가 어디서 돈을 훔쳐서 이런 것들을 사 온 것인지 불같이 화내고 목걸이를 집어던진다. 마치 자신이 마미임을 거부하듯이. 여기에 스티브는 자신의 사랑을 전달한 방법이 실패하자 집 안의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고, 급기야 엄마를 죽이려고 한다. 엄마의 목을 힘껏 조르며, 방금 전까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폭군으로 변한다. 엄마는 살아야 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분명한 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대신 죽어 줄 수는 있지만, 죽여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디안은 옆에 있던 물건으로 스티브를 쳐내 간신히 도망친다. 그쯤 되면, 영화 초반부 캐나다 법령이 다시 떠오른다. 엄마는 살기 위해 자식을 버리고 도망칠 권리가 있다. 그때 등장한 이웃 카일라의 도움으로 사건은 일단락된다. 카일라는 디안과 스티브를 모두 감싸 안을 만한 커다란 태양처럼 따뜻한 존재다. 조심스럽고 세심한 성격 때문에 말을 자꾸 더듬어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스티브가 그녀의 가슴을 만졌을 땐 그를 거의 죽일 듯 덤벼들어 경고를 하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소우주이기도 하다. 카일라는 스티브의 홈스쿨링 선생님이 되고 디안은 덕분에 생계를 이어나갈 일을 찾아간다. 세 사람은 종종 저녁을 함께 먹으며 파티를 하고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도 한다. 두 사람의 삶에 카일라는 하나의 선물 같은 존재였으며, 희망이었다. 어쩌면 둘이서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니 어쩌면 셋이서 말이다.


스티브가 집에 돌아오기 전 마트에서 불을 지른 사건으로 당시 화상을 입은 아이의 고소장이 날아오고, 다시 디안은 이겨낼 수 없는 짐을 떠안는다. 스티브의 변호를 맡아달라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디안은 옆집 변호사 아저씨와 데이트를 하고 그날 스티브는 가라오케에서 "나 그녀를 위해 살리"를 부른다. 언제나 엄마 하나만을 바라보는 가엾은 스티브의 여리디 여린 무대가 이어진다. 변호사가 도와주지 않고 오로지 엄마의 누가 그가 마트에 불을 질렀다고 예측이나 했겠는가.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은 스티브는 역시 죽일 듯이 달려든다. 어쩌면 엄마의 몸만 노리는 그 망할 변호사 새끼의 몫까지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스티브는 결국 마트에서 자살 시도를 하게 되고, 위태로웠던 그들의 삶은 무너진다. 디안은 카일라와 셋이 여행을 떠나자고 한다. 그리고 약속했던 장소 한 곳에서 스티브를 다시 시설로 데려가게 한다. 스티브는 격하게 발버둥 치며 자신을 배신하고 버렸다며 욕설을 해대지만, 시설 관계자에게 결국 끌려가 다른 차에 탄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디안의 마음은 찢어진다. ‘언젠가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난 늘 엄마를 위해 살게'라고 말했던 스티브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디안의 고통은 자신의 가슴을 쥐고 울음을 토해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널 더 사랑할 거야. 반대로 넌 날 덜 사랑하게 되겠지.' 결국 디안이 했던 말이 증명되진 못했지만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보여서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스티브를 보내기전 디안이 스티브와의 완벽한 미래가 환상처럼 혹은 사실처럼 보여지는 부분이 꽤나 길어서 관객은 잠시 그 희망을 해피엔딩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후 펼쳐지는 날카롭고 자극적인 비극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후빈다.


Everybody Born to Die

영화 속 스티브는 결국 보호 시설에 다시 갇히게 되지만, Lana Del Rey의 Born to Die의 엔딩곡과 함께 탈출하며 영화는 끝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의 이름과 엄마의 이름인 다인과 결부시켜 Born to Dain으로 해석해 스티브의 엄마를 향한 강렬한 사랑의 비유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가장 적절한 해석이겠지만, 나는 Born to Die를 영어 뜻 그대로 해석하고 싶다. 누구든 결국엔 하나의 인간일 뿐이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디안, 스티브, 카일라 그들 모두 언젠가 이 전쟁도 끝나고 사라질 존재다. 마지막 디안과 카일라가 나눈 덤덤한 대화처럼 우리의 삶의 본질적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과 우린, 이 삶에서 조금의 희망을 가져보는 것 정도는 허용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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