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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Jun 06. 2019

영화 크로닉(Chronic)

죽음에 대한 상실도 만성이 되는 것일까

만성의 불가능함을 말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Chronic이지만,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만성형의 삶은 가진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 만성이라는 것은 평생을 앓은 비염, 아토피, 천식. 어떤 이유로 갑작스레 셋 중 하나가 도지면, 겨우 내뱉는 말은 ‘또 그러네’.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여운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크로닉에서 사람들의 삶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서 꾸역꾸역 살아내려는 의지를 드러내지만 결코 만성적 질환처럼 익숙해 보이진 않는다. 결국 그들이 최후로 선택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간호조무사로 환자 집에 방문해 수발이 되어주는, 남을 배려하기 위한 프로페셔널한 방법에 능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불치병 질환에 있어 회복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데이비드는 오래전 자신의 아들을 안락사 한 경험이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이혼을 하고 첫 딸을 만나고 싶어도 그때의 감정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어 달리기를 하거나 그저 딸을 몰래 바라봄으로 자신을 다독인다.

만성은 인간을 지독하게 만든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차 안 조수석쯤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미동도 없는 롱테이크가 3분 이상 지속된다. 롱테이크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영화를 꼽자면 멋진 하루(My Dear Enemy, 2008)를 들 수 있는데,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 여성의 발을 따라 경마장에 들어가고 하정우의 뺨을 때리기까지 모든 것이 한 테이크에서 이뤄진다. 크로닉은 조금 다르지만, 역시 기가 막힌 롱테이크가 첫 컷을 완성한다. 이 롱테이크에서 컷이 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몰래 지켜보는 조수석의 시선에서 주인공의 옆얼굴로 이동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제삼자의 관객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이 순간부터 이 남자의 삶을 관망하게 된다. 어딘가에 만성되지도 못한 채 고통받지만 남을 오히려 정성 다해 도와주는 주인공. 관객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지도 못한 채 그의 지독함을 바라보며, 그저 그의 죽음을 목도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이 데이비드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데이비드와 환자와의 관계

영화는 사지 마비, 에이즈 같은 죽음을 향한 길에 서 있는 환자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환자 본인은 쓸데없는 고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거나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한다. 데이비드는 이러한 질환에 걸린 환자들을 돌봐주며 환자와 함께 절대 만성되지 않는 질환적 상황에 동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가장 만성적인 사람은 데이비드가 돌보는 환자의 가족이다. 더 애도하고 슬퍼할 법한 가족은 이제 환자의 병은 익숙해졌다는 듯 과거 무용수였던 환자의 정상 시절을 쉽게 들춰내며 고통만 자극한다. 때로는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고들 하지만 결국 환자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의지할 곳은 데이비드 밖에 없다. 실제로 영화에서 첫 환자로 등장하는 세라는 에이즈 환자로 겨우 손가락 정도 움직일 수 있는 단계로 병환이 깊다. 데이비드는 세라의 모든 움직임은 물론 목욕, 요리 모든 것을 대신한다. 세라의 생각, 움직임, 욕구까지 데이비드가 거의 대부분을 행동으로 옮긴다. 아치형 천장이 있는 마당에서 풍성한 식물들에 싸여 데이비드가 세라에게 부드러운 음식을 한 숟가락씩 떠먹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유대감을 관객에게 깊이 전달한다. 그 후 세라의 장례식이 끝나고 데이비드는 혼자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바텐더의 위치에서 데이비드를 정면으로 촬영한 컷은 총 세 명이 앵글에 들어오지만 데이비드와 오른쪽에 있는 매력적인 여자 한 명을 주로 잡는다. 마치 정보 전달을 위한 아나운서처럼 바에 양손을 올리고 앉은 주인공은 옆 여자에게 자신의 부인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말을 한다. 약혼을 축하하던 그녀는 유감을 표하며 세라를 위해 건배를 한다. 세라가 데이비드에게 환자 그 이상, 혹은 인간적 유대감을 완성케 한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 데이비드가 환자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독특한 방향이고 어쩌면 지나치게 따뜻한 남자라는 것이 증명되는 시퀀스다. 딸을 스토킹 하며 단순히 여자 몸을 씻기고 옮기는 미스터리 한 남자에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깊은 상실을 느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바에서 손깍지를 끼고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외로운 존재로 비치는 순간이다.


타인에게 용인되는 수치

이 영화에서 가장 떨칠 수 없는 생각은 가족들의 무책임함에 비해 데이비드의 슬픔과 책임은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불편함은 데이비드가 대신 남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뛰는 마라톤 선수처럼 보이게 할 정도다.

데이비드는 다음 환자 존에게 찾아간다. 저택에 사는 대가족은 온몸이 굳어버린 존을 데이비드에게 건넨다.(이 표현 외엔 그들의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다.) 고집불통 망할 영감탱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존은 일단 욕설과 함께 이불에 변부터 싸고 시작한다. 전문가 데이비드는 순식간에 존을 씻기고 침대에게 가장 편한 자세를 잡아준다. 존은 데이비드와 시간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자신이 건축가고 가족들에게 병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건축가로서 인정받아온 그의 삶을 들여다 보고 좀 더 그를 이해하고 싶었던 데이비드는 서점에 가서 그가 보고 싶어 할 만한 건축 서적을 구입한다. 그때 서점 직원에게 자신이 건축가라고 소개한다. 세라와는 조금 다른 그러나 맥락은 비슷한. 데이비드가 존을 생각하는 정도는 자신 자체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존의 가족은 데이비드가 존을 성추행했다고 고소하고 접근 금지명을 내린다. 함께 포르노를 시청하고 목욕을 시켜줄 때 존이 발기되어 있었으며 심야 교대시간까지 모두 데이비드가 자처해서 존 곁을 지켰다는 이유다. 가족보다 타인에게 수치스러움을 용인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가족들이 서로 잘 알거라 착각하는 데다 정작 자신은 본연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진짜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타인에게 보여준다. 늙어서 아파보면 어쩌면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상처와 상실의 반복

데이비드는 성추행 사건 이후 잠시 틈이 나 딸을 찾아간다. 의대생인 딸을 보고 먼저 부르지도 못한 채 뒤를 따라가다가 딸이 알아보자 그녀를 품에 안는 데이비드.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그의 조심스러움이 관객에게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다른 환자를 돌볼 때 프로다웠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자신의 가족은 부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주인공. 묵직하다 못해 무거운 추처럼 자리한 고통의 짐이 데이비드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며칠 뒤 한 아주머니를 다시 환자로 받게 되는데, 그녀는 존에게 성추행 한 전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전의 실력을 믿고 고용했다 말한다. 그녀는 사지를 못 움직이기거나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기 치료로 인해 갑자기 설사를 하거나 밤에 극심한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그녀의 집 거실에서 잠을 자며 그녀의 밤을 지키거나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간단한 요리를 했다. 아주머니의 병환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급기야 데이비드에게 안락사를 부탁한다.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죽였던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완곡히 거부하지만 그 질환의 고통을 알았던 데이비드는 그녀의 말대로 안락사를 하게 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죽음을 끝내버리는, 어쩌면 살인에 가까운 그의 행동은 환자의 고통을 이어받듯 신성하다. 환자의 고통은 끝났지만, 자신이 살인 비슷한 것을 했다는 사실로 더 큰 상실감을 얻은 그는 헬스장 러닝 머신이 아닌 동네에서 조깅을 한다. 계속 그가 뛰는 장면을 정면에서 카메라가 정확한 박자로 뒤로 이동하며 이상하리만큼 오래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이 지금 뭐 하는 걸까 라고 방심하는 순간, 데이비드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멈춰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묵직한 연기와 죽음에 대한 울림

마지막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충격과 안타까움을 준다. 그는 어느새 환자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통해 죽음에 대해 만성을 갖고 있었던 걸까. 마치 정신병자를 돌보던 상담자가 자신마저 미쳐버리듯이, 데이비드는 환자들을 그렇게 다정히 보내고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갔다. 데이비드 역시 흔히 얘기하는 가족이 없었고 오히려 환자가 가족이었다. 그의 마지막 판단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나 영화 속 모든 상황으로 인한 그의 죽음에 대한 결정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데이비드 역을 맡은 팀 로스는 지옥에서 일상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데이비드와 일체화된 언행, 특히 쳐진 이목구비와 무거운 몸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다져진 어깨 근육이라던지, 무늬 없는 티셔츠만 입는다던지, 옆을 지나가면 절대 인지하지 못할 존재감이지만 그가 표한한 간호조무사 데이비드 삶의 일부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분명 삶의 일부만 봤음에도 이렇게 상실감에 숨이 막힌다. 내가 지금 간신히 바라는 것은 그가 몇십 년 전 혹은 어렸을 적쯤 좀 더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봤길. 인생에 즐거움 같은 것이 잠시라도 있었던 사람이길 그의 과거라도 보살피고 싶은 것이다. 무의미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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