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있는 쓰레기
나는 바람을 종종 피웠었다.
누구는 나에게 대단하다 했다.
어떻게 그렇게 연애에 대한 열정이 식지가 않니.
나에겐 연애라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과 투게더, 플레이
이러한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상대방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맹목적인 애정이었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사랑에 가까운 남자는 대부분 내가 순진무구하게 그들의 여우짓에 그대로 녹아들었을 때다.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여자를 다루는 것에 능숙한 남자들이 나처럼 다루기 어려운 여자에 흥미를 느끼다가 결국 사랑이라고 혹은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87년생이다. 오래전부터 아마 12살 정도? 어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다. 문 앞에 붙어 있는 보육원 스티커.
“갈 곳 없는 친구들을 환영합니다”
나는 가고 싶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34년 전에 지냈던, 나의 출처인 자궁을 진지하게 의심했다. 정말 나의 부모는 그들인가. 부모라면 나를 눈앞에 두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까지 그들의 싸움을 기억하고 되새겨 나를 스스로 좀먹는 것일까. 물론 그들은 나를 위해 희생하고 투자하고 다른 어떤 부모들보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어떤 가족, 패밀리쉽을 느껴본 적은 없다. 어색하다. 여전히 한공간에 있는 것은.
최근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봤다. 모자가 있는 집 안에 이혼 예정인 아버지가 사냥용 총을 쏜다. 그 이유는 문을 열으라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화장실에 갇혀 아빠가 칼을 들고 문을 열라고 했을 때. 미친년 둘 다 죽인다고 문 열라고 했을 때. 난 그 기억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항상 삼각관계였다. 엄마는 아빠를 굉장히 미워했고 나는 그 얘기에 너무나 공감하고 심취해 아빠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금 생각해보니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체가 너무나 모자란 생각이었다. 아내는 아내의 입장이 있는 거고 딸은 딸의 입장이 있다. 그것이 너무나 합체되어 동기가 일체 시 되는 순간 객관적 판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연애를 하려는 열정 그리고 노력 그것은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거였다. 어떻게 연애에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거냐 묻는다면 그땐 그랬다. 삶의 이유를 억지로 찾아가려다 보면 가까운 외부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거다.
나는 지금 연애에서 얼마나 벗어나 살아가고 있는가? 분명 중요한 것은 내가 여전히 남자에게 의지를 하고 있을진 몰라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온전히 나로부터 찾았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건 이렇게 때로 좋은 변화를 느껴가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