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창궐한 어느 여름날
허지웅 작가가 얼마 전 책을 냈다.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작가의 책이 나올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 제목을 기가 막히게 뽑는다. 나의 친애하는 적, 버티는 삶에 관하여 그리고 살고 싶다는 농담.
최근 삶의 이유를 ‘나’로 포커싱한 뒤로 타인에 의해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타인에 의해 피로하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분명 이 사회, 경제면에서는 많은 손실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사람으로 인해 항상 피로하다. 요즘 거리두기가 개인적으로는 더욱 5단계까지 필요하다. 내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누군가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 그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먹을수록 경력이 높아질수록 불편하다. 상대방이 나쁜 사람인가 봐~ 이런 단순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상대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다시 말해 내가 뇌로 어떤 인간이 내 주변 일 미터 내에 있다고 인지하는 순간 불편한 거다. 그럼 이제 네가 이상한가 봐~라고 하겠지. 과연 내가 이상한 걸까? 글쎄. 나는 누구보다 사람을 싫어하지만 누구보다 사람에게 종속감을 느끼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고아로, 성인이 되어서는 독립체로 살아온 34년. 젊다면 젊고 성숙하면 성숙한 나이겠다.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있는 것, 지내는 것이 너무나 편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구가 든다.
최근 가장 행복하고 안정적이었던 순간이 있다. 현 남자 친구와 지하철에서 헤어지기 싫다고 서로 안고 있었다. 과거에 남들이 그렇게 있는 것을 보면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젠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뭐 모태솔로 같은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이 만났다. 그저 많이만.
그런 포옹은 마치 가제의 집게발과 같다. 신체 중 가장 강한 부위라는 가제의 집게발. 그것을 이용해 서로를 엮는다. 실제로 가제는 떨어질 수 없는 부모나 자식과 집게발로 잡고 다닌다. 나도 지하철에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을 하고 있는 기분 말이다. 덥고 습한 여름날, 마스크를 껴고, 서로의 땀내를 맡으며 안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날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한 타인과의 관계는 나를 보통의 사람으로 만들고 안정감을 준다.
최근 입사를 했다. 이 시국에 그나마 나은 연봉과 업무로 골랐다. 빚이 늘었다. 끊임없이 지출이 늘어난다. 돈은 써도 써도 잘 써진다. 쓸 때마다 기분이 좋다. 새 가방, 구두, 드레스, 지갑 등 그것들은 인간과 다르다. 그저 나에게 포장되어 날아와 내가 잃어버리지 않는 한 버리지 않는 한 내 옷방에 남아 나를 지킨다. 그 무생물들이 많아질수록 행복하고 설렌다. 그러나 통장 잔고는 거덜 난다. 그래도 나는 물질들과 하나가 되어 소속감 이상의 완성감을 느낀다. 나의 곁을 지키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완성하고 나에게 아름다움을 조금씩 양보해준다. 그렇다. 서서히 미쳐가나 보다. 그래도 인간들은 나를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냥 빚쟁이로 행복해야겠다.
삶이 즐거운 적이 있는가 묻는다면 당연히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삶은 즐거운 것인가 묻는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순간을 수집하는 종이다. 그 순간은 즐거움 슬픔 우울함 기쁨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개인이 느끼는 어떤 감정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감정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심리상담가인냥 멘트를 날리고 싶지만 오늘은 그게 스스로 힘들다. 바이러스로 가득한 한 여름날, 빚에 쪼달리며, 강남역을 걸어 한 시간 이상의 퇴근길에 오를 때, 어떤 종이 즐겁다고 할까. 그렇지만, 집에 나의 옷방이 기다린다. 그 순간의 감정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겠지. 그러니 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저녁은 떡볶이를 먹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