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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let Jun 10. 2019

영화 어느 가족

‘어느’ 공동체가 가진 조금은 씁쓸한 이야기


잠깐 사담을 나누자면 내 블로그 이름은 어느 계집이다. 총명한 계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의 이름을 가지고 ‘어느’ 세상에 꼭 집어 말할 필요 없는, 이 세상의 막연한 한 계집애라는 뜻으로 만들었다. 어느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그 추상적인 여럿 계집 중에 어느 계집만이 특별해지는 효과를 보는 것은 비단 나만 느껴본 단어 놀이는 아닐터다. 영화 ‘어느 가족’도 그러한 어느를 통해 세상의 모든 가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속에 어느, 한, 지금부터 말하려는, 생각해 볼만한, 가족의 또 다른 세계관을 관객에게 툭 던진다.


지난 2018년 칸의 황금종려상은 당연히 버닝이 될 거라 생각하며, 설렜던 나의 기대는 무참히 처지 되고 웬 가족 영화인 어느 가족이 수상하는 것을 보고 ‘영화계는 망했어’라며 쓸데없이 비아냥 거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나는 희한하게도 기생충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고 어느 가족을 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칸의 황금종려상. 두 번 다시 세계 영화계에 없을 버닝 같은 영화를 제쳐두고 어느 가족을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그 영화가 가진 ‘어느’ 힘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올해도 가족 영화 기생충이 수상한 것을 보면 최근 전 세계적인 이슈인 가족의 해체와 부재가 영화계에서도 관심 높은 사안으로 보인다.


물은 피보다 진하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중제다.(일단 다소 클리셰적인 문장을 사죄하겠다.) 남보다 못한 가족과 함께 살아본, (겪어본) 이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피를 나눈 가족들은 서로에게 기대치가 높고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서로 종속되어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에 당당히 선을 넘고 폭력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기존에 가족이라 여기는 모든 개념을 버렸다. 대신 우리가 이상적으로 갖고 있던 가족의 따뜻함, 정다움, 유대감, 환대 등을 위주로 서로의 인간적 다름을 인정해주는 어느 가족이다. 집은 모두의 안식처로 직장에서 잘려도, 전 남편 가족들에게서 돈을 받아와도, 성관계 업소에서 일을 하던, 그에 대해 소위 잔소리, 미래의 걱정에서 오는 악담을 퍼붓지 않는다. 심지어 아빠(오사무)와 아들로 보이는 관계는 도둑질로 생필품을 마련하는데 구성원 모두 이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을 정도다. 영화 후반부에 알게 되지만, 그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서로가 서로에게 외부인이다. 그렇기에 지나친 관심과 규제에 대한 권한과 의무가 없었던 것. 하지만 그들은 그 낡은 집 안에서 옹기종이 모여 따뜻함으로 서로를 아꼈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의 온기는 그 무엇보다 개인의 삶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지금 너무 좋아서 서로 아껴주는 이들. 그렇지만 헤어질 거다. 어느 가족은 어쩌면 어느 시한부의 연애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가족=집. 우리네의 집은 어디일까.

우리는 가족이 사회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라 배웠고, 모든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집에서 끝낸다. 영화 역시 그러한 집의 순환을 가졌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그 집이 ‘어떤 상황에서도’ 구성원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밖에서 실제로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설령 그것이 가족과 관계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구성원들은 집에 오면 행복해진다. 내가 쉴 수 있는 곳, 나를 받아주는 곳, 날 따뜻이 품는 곳. 최근 사람들에게 이러한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과연 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영화는 이웃집 밖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데려오면서 초반부 전개가 시작된다. 물론 다시 집으로 보내주려 하지만 안에서는 꽤 격렬한 부부 싸움이 일고 있었고 소녀 엄마의 말 한마디가 노부요의 귀에 꽂힌다.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줄 알아? 나도 낳기 싫었어.’ 노부요는 그 집에 소녀를 보내지 않고 소녀에게 새 이름을 주며 자신이 엄마가 된다. 마치 세상 순리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집에서 학대를 당했던 것과 달리 소녀는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할머니가 이불에 오줌 싸지 말라고 손에 소금을 쥐어주는가 하면, 노부요와 함께 목욕하며 서로에게 똑같이 생긴 팔의 상처를 보여주며, 마음(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공감대를 가지기도 한다. 소녀는 드디어 집과 가족을 찾았다. 실제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들로부터.

하지만 이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했다. 감독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큰 아들이 도둑질을 하다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는 법적 보호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아빠는 아들이 병원밥 먹고 잘 지낼 거라며 나머지 구성원과 도망치려 했지만 집 문 앞 바로 붙잡힌다. 경찰 조사로 할머니 시신이 집 안에 있다는 것. 아이들은 모두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 두 부부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는 것. 우리가 사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영화 막바지에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게 토해낸다.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던 서로의 과거들을 안은 채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잠시 동안이라도 아빠라고 엄마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 곁에서 떠나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간다. 노부요는 경찰 조사에서 린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배 아파 낳으면 다 엄마가 되나요’라고 말하자 경찰은 ‘배 아파 낳아주지 않으면 자식도 없죠’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흐느끼던 노부요의 눈물이 비참하기도, 어쩔 수 없기도 한 현실에 가슴을 타고 흘렀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대사. 집으로 돌아간 쥬리는 이제 엄마에게 새 옷을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새 옷을 입는 날 폭행을 당하기 때문) 그것만으로 다행이다. 담벼락에 발을 올려 혹시나 그 어느 가족 중 한 명이 지나가지 않을지 내다보는 쥬리의 눈에는 지난 온기와 그리움이 가득하다.

영화 중반 부쯤 집 안에서 고개를 내밀어 가족 모두가 하늘의 불꽃놀이를 보는 씬이 있다. 정작 불꽃놀이를 보여주지 않고 마치 연극처럼 배우들의 연기만 하이앵글로 보여준다. 이들의 순박하고 다정한 얼굴을 감히 잊을 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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