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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 Aug 07. 2024

암밍아웃

나를 살게 하는 이유 

암진단을 받고 나서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생겨났다.


당연한 순서로 가족에게 알려야겠고, 다음엔 친한 지인들, 가끔씩 연락하는 사람들... 에게까지 일일이 얘기를 해야 하나? 이게 뭐라고? 그래도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할 기회는 줘야 하나? 가는 마당에 뭘 그렇게까지 배려를 해야 하나. 아니 지아니지. 난 살 건데, 그냥 연락하지 말까?


일단 '암밍아웃'은 3단계 정도로 나눴다.

제일 먼저 언니들과 동생 그리고 아이들

그다음 친한 지인들

제일 어려운 단계인 부모님.

가끔 연락하거나 거의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굳이 일부러 알리지 않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한 친구들 외에 현재 나의 가장 친한 지인들은 북스타그램을 하며 만난 인연들이다.

코로나 때부터 시작한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햇수로도 5년 차.

거의 매일을 안부를 주고받으며 책얘기를 나누고 줌을 통한 독서모임을 정기적으로 하고, 오프라인에서의 만남도 여러 번이었으니, 웬만한 친구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스타그램에 담담하게 글을 올렸다.

믿기 힘든 사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이며 조심스럽게 건네는 댓글과 연락들과 선물들.

이틀 동안 난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유방암 환우님이 쓴 글에서 '나는 안 괜찮으니까 괜찮냐고 물어보지 좀 말라고, 당신들이 내 맘을 알아?'라고 피로감을 호소한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맞다. 충분히 이해한다.

지금 이 상황을 그 누가 완벽하게 이해할 것인가.


하지만 이와 다른 그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위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위로의 언어와 행위의 진심여부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테니.

나는 피로감보다는 감사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정말 큰 충격으로 느낌과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삶에서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에 조심스럽고 염려스러운 안부를 건네었을 테고,

새로운 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가십거리가 됐을 거고,

누군가에겐 오늘의 안위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해 줬을 테고...

뭐가 되든 나는 상관없다.

하나하나의 조심스러운 안부가 나는 다 고맙게 느껴졌고.

개중 친한 사람들의 진심 어린 편지들과 선물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음을,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줬고, 그로 인해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 더 확인한 느낌이었다.


언제나 나의 부족함을 환기시켜 주고,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게 해 주고,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새기게 해주는 북스타그램의 귀한 인연들.

나는 이렇게 또 그들에게서 진정한 위로와 안부는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지금 내게 가장 편안함을 주고 자주 만나는 모임 '데이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지만 친해진 건 결혼하면서부터인 은정이와 한 살 후배 미애.

ESTJ인 은정이와 ENTJ인 나와 미애는 크게 감정적 소모 없이 자기 자리에서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는 스타일이다.

삶의 관점은 다르지만, 성향이 비슷하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깔끔하고 뒤끝 없이 즐겁기만 하다.

역시 카톡방은 불이 났지만, 분위기는 여느 카톡방과는 사뭇 다르다.

달라질 건 없다. 당장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진단을 받았을 뿐이니까.

슬픔에 잠식당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는 그냥 수다를 떨었다.


내가 얘기했다.

"그거 생각난다. 손예진 나왔던 거. 서른, 아홉이었나? 거기서도 세명중에 한 병이 암 걸리지 않았었어?"

"그럼, 나는 손예진!"

미애가 얘기한다.

"아이씨, 내가 손예진 할라 했는데. 아닌가, 나는 어차피 역할이 정해져 있는 건가?"

내가 얘기한다.

"역시 한 살이라도 어린 미애가 빠르다!ㅋㅋㅋ"

은정이가 얘기한다.


항암 들어가기 전, 만날 약속을 정하고 기분 좋게 핸드폰을 닫는다.

이 와중에 어떻게 이렇게 농담하며 떠들 수 있냐고?

그래서 이들이 참 좋다.

T들의 담백한 위로가 지금 내가 마주한 이 병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


내게 일상의 작은 행복을 채워주는 이 좋은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어 진다.



엄마의 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2, 중3, 초등학교5학년.

너무 희망적으로 얘기할 수도 그렇다고 너무 절망적으로 얘기할 수도 없었다.

결국은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

엄마는 암이라는 병에 걸렸고, 엄마의 암은 다른 암보다 좀 더 힘들 수 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 많이 아프고 먹지 못하고 머리카락도 빠질지도 모르고 계속 누워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 암이라는 병을 없애는 과정이니 엄마는 잘 이겨낼 거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파이팅 넘치게 얘길 했으나...

아이들은 눈물을 쉬 멈추지 못했다.

특히 막둥이 은우가 꺼이꺼이 계속되는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몸이 좀 아파도 아프다 얘기도 안 하는 무던한 아이다.

속 깊고 배려심 많고 조용한 우리 은우가 그렇게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은 아마도 처음 본 것 같다.

내 새끼 아프게 한놈은 누구라도 찾아내서 혼내줘야 한다는 소명을 가지고 있는 엄마의 입장에서

오히려 내 새끼를 아프게 한 주체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현실의 참담함이 더욱 거세게 다가왔다.

말 그대로 가슴을 결대로 찢어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거듭 울음을 삼켜내는 아이를 보며 다시 한번 결의를 다져본다.

나는 꼭 살아야 한다!

꼭 살아서 우리 아이들 곁에 무조건 버티고 있어야겠구나라고.



제일 어려운 단계. 부모님.

나는 어려서부터 참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위로 언니 둘,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남자아이를 바랐던 집안 분위기상 나는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쳐선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아마도 태생적으로 느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투정을 부린 기억이 없다.

철이 빨리 들었고, 그나마 부모님의 시선을 받고 싶어서 뭐든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속한 번 썩인 적 없고,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받지 않았다.

대학등록금부터 모든 걸 알아서 했고, 결혼할 때조차 모아놓은 돈을 부모님께 드리고 결혼했다.

그렇게 내 삶은 어느덧 부모님의 자랑이 되어있었다.

처음엔 같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유독받지 못하고 자란 내가 조금은 분하고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내 삶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면서 오히려 드릴 수 있음이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걸 엄마, 아빠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준 게 없지만 우리 주혜는 늘 똑 부러지게 자기 일 알아서 잘하고 뭐든 해내는 딸.

그런 나의 암밍아웃에 엄마는 한없이 무너지셨다.

제일 단단한 손가락이었는데 이제 유달리 더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렸다.

어떤 얘길 전해도 어떤 씩씩한 모습을 보여도 엄마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 참척의 고통이라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아이들이 아픈 것보다 대신할 수만 있다면 내가 아픈 게 나으니까...

그런 고통을 부모님에게 드릴 수는 없다.

'엄마'는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오롯이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겹핍과 그리움 속에 있는 이름이다.

그런 엄마가 이제 나만 바라본다.

그게 참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조금 지나니 이렇게라도 또 엄마의 깊은 사랑을 받는 시간이 오는구나 싶다. 그래서 이제 조금은 그런 관심들을 누려볼까 싶기도 하다.

이제서라도 진짜 어리광을 부려보는 거지 뭐...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란 말이 탁월한 문장임을 절감하는 요즘이지만, 이 암이라는 것을 마주하면서 

삶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그래도 살아왔구나 느끼게 해주는 인연들에게 너무 감사함을 많이 느꼈다.

결국, 나는 살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 또 내 곁의 모두를 위해서

암밍아웃의 과정은 나에게 한번 더 생의 의지를 보탤 수 있게 해 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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