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탐구생활 - 미스터 선그라스

휴게실의 낭만가이

by 안과장


정확히 입사 1년째 되던 날. 사수 책임님이 부재동안 나에게 이거 저거 알아봐줬음 좋겠다는 숙제를 남기고 휴가를 가셨다. 크으 나도 드디어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할 만큼이 된 것인가. 불끈! 마음을 먹고 그중 가장 쉬워(?) 보이는 일 부터 처리를 하다가 다른 부서에 전화해서 뭘 알아보라는 업무에서 멈추고 말았다. 다들 신입인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처음 보내는 메일, 처음 받는 전화, 처음 걸어본 전화. 처음 하는 메신저. 지금은 자연스러운 그 모든 것들이 처음엔 왜 이렇게 떨리는 일이었는지.


큼큼. 침 한번 삼키고, 사수님이 시키신 거 정확히 다시 한번 파악하고.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눌렀다.


나 : 안녕하세요- 어디 파트 누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분석 결과 오늘까지 보내주신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진행상황 확인 가능하실까요?


상대방 : 네? 지금 저 닦달하시는 거예요??????????

잠깐만요-


하더니 부스럭부스럭.

저쪽 수화기가 제삼자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제삼자 : 저기요, 뭔데 우리 선배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시는 겁니까? 예? 이게 닦달이 아니고 뭐예요? 아시겠어요?


나 : 저는 휴가가신 선배께 오늘 일정으로 받았는데, 혹시 늦어지거나 하면 말씀드려야 하니 전화드린 건데요? …..


제삼자 : 그게 닦달이 아니고 뭐냐고요 차암내. 암튼 오늘은 안됩니다 아시겠어요???

뚜—-


이게 벌써 12년 전의 일이라 대화 내용이 토씨하나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서 운 기억은 선명히 남아있다. 홀수 해에 고비가 온다더니 그게 바로 이건가(꺽꺽). 1년차에 벌써 이러면 다음은 어떡해(꺽꺽). 돌이켜보면 뭐 이런 걸로 속상해했을까 싶을 만큼 이런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한데, 이때의 난 참 여리고 그랬나 보다. 뭐 이런 걸로 울었을까.


여하튼 입사 1년 꽉 채운 나에게 모멸감을 준 그는 소문에 의하면 거기서도 ㄸㄹㅇ 질량 보존의 법칙의 대부분에 기여한 건진 몰라도 소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부서에서 다른 데로 전출, 거기서 또 전배, 그러다 나와 같은 실 소속이 되어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다시 만난 게 그로부터 한 5년 후다. 그는 본인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같은 부서의 여자애랑 공공연히 사내연애 중이었고, 점심시간 몇 안 되는 휴게실의 테이블과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아니 반쯤 누워) 그 여자애와 함께 음악감상을 즐기곤 했다. 처음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공용의 공간에서 소파에 누워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한 팔로는 허벅지로 장단 맞추면서 저렇게 있어도 된다고?


언젠가는 점심 먹고 동료들과 산책을 하는데 건물 주변에 선그라스를 끼고 산책하는 그를 마주친 적이 있다. 결국 그 낭만파 여자애와 결혼하고서 같은 부서에 1년 동반 휴직을 하고 여행 다녀왔다는데(그쪽 부서장께서 다신 사내커플 반대라고 한다 - 그게 반대한다고 될 일이겠냐만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피해 주면서 본인만 행복한 삶을 사는 그는 행복할까? 행복하겠지? 그런 사람들이 혹시 행복은 별게 아니야 하면서 지껄이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역시나, 빌런에게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남의 눈치는 보지 말고 나만 행복한 삶을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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