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방울이 된 BB씨에 대하여
직장인이 되기 전엔 ‘회식’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술을 얼만큼 마실 수 있는지도 몰랐고, 술을 능력치대비 많이 마셨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 하지만 이건 기우였다. 회식 문화도 많이 바뀌어서 테이블에 제로 콜라가 올라오는 세상이지만 꿋꿋하게 소맥 자작해서 마시는 직장인이 되어버릴 줄이야.
그런 건강한(?) 사회적 분위기는 환영이나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회식자리의 각종 에피소드류가 점점 사라져서다. 신입사원 때 윗 선배가 술 먹다가 사라져서 찾으러 나가보니 따수운 자동차 본넷 위에서 자고 있었다는 얘기는 10년이 지났는데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새 나온다. 뿐 아니라 그 시절을 떠올리면 비엔나소시지같이 줄줄이 따라오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오늘은 그 중 한 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그의 이름은 BB씨.
BB씨는 나보다 후배로 입사했다. 키 크고 풍채도 좋고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꽤나 잘생겼구나 싶은 얼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의 모습에 부자라는 소문은 사람들 모두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감도 과유불급. 쟤가 말을 이렇게 하더라 저렇게 하더라 부서 선배들의 험담들이 퍼져가면서 어후 같이 일 안 해서 다행이다 + 후배로 들어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고 있을 무렵 시간은 흘러 연말이 되었다.
조직에서 연말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 단어, 송년회. 그때는 코로나도 훨씬 전이라 노래방 기계가 있는 큰 식당을 대관해 노래는 물론이요 가족오락관 방불케 하는 게임하고 선물 나눠갖는 게 트렌드였다. 우리도 질세라 회사 후문의 어떤 고깃집을 통으로 빌려 한 40~50명 파트별로 불판을 사이에 두고 4 분단 정도 만들어서 고기 앞에 두고 술 한잔 드리고 마시면서 단체게임하고. 나도 상사에게 이럴 때 시켜보자며 부장님 잡고 끌어 노래도 시키고 그렇게 고기도 익고 연말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송년회의 하이라이트 순서가 왔다 : 그룹장님의 격려사 시간.
키가 작고 왜소했던 당시 그룹장님이 일어나 마이크를 붙잡고 사람들 앞에 섰다. ‘여러분~ 맛있게들 드셨나요?’라고 하며 포문을 여는 그 순간. BB씨가 일어나 저벅저벅 그룹장님께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취한 사람도 이게 뭘까 하고 눈을 비비고 술이 깨랑말랑 해 버리는 그 순간 어느새 그룹장님께 도착한 BB씨는 양손을 동그랗게 말아 그룹장님의 왼쪽 귀에 대고는 귀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함이 무색하게 마이크를 통해 고요했던 고깃집에 퍼진 두 마디 : ’ 짧고 굵게 ‘
깜짝 놀라 다급해진 그의 부서장께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일어나 그를 끌고 자리에 앉으셨다. 그룹장님이 평소에 말이 많으시긴 했지만…. 좋게 말해 BB씨의 두 마디가 사이다긴 했지만… 박수보다 민망함의 공기가 고깃집에 깔린 건 아무도 말하진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 저 새끼 미쳤구나.
바로 다음날. 조직 개편은 3주 정도 앞두고 있었지만 BB씨가 짐을 싸더니 사무실을 나가는게 보였다. 갑자기 다른 팀으로 인사이동하게 되었다며.
그로부터 몇 년간은 마주 칠일 없다가 5년 전 같이 일 할 기회가 생겼다. 걘 ‘짧고 굵게’를 기억하고 있을까?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회식 때 한번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기 때문에 맞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왜 BB씨냐고? 점심시간뿐 아니라 업무시간 대부분을 고개를 숙이고 주식을 하느라 모니터가 늘 화면보호기였는데, 검은 바탕에 비누방울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윈도우 기본 화면이었다. 자리에 있을 때조차 고개 숙인 뒤통수 뒤로 비누방울(bubble)만 보이니 원.
요즘은 미장국장 다 안 좋은데 여전히 부자일까?
여전히 패고 다닐까? 여전히 짧고 굵을까? (응?)
궁금하진 않지만 지나가다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웃을 일 없는 일터에서 참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