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유차 천지현격”이란 말이 있습니다. 털끝 만큼의 차이도 천지만큼의 격차를 보인다는 뜻이지요. 불법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현상적인 접근에 머물게 됩니다. 틱낫한 스님도 깨달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불도를 현상적으로만 이끌고 있습니다. 불도에서 말하는 마음은 틱낫한 스님이 말하고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고요함, 비움이라는 표현은 번뇌를 벗어나란 뜻인데요. 번뇌는 벗어나고 싶다고 쉽게 벗어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어찌 감각이 동작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립니다.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으면 상상과 생각이 떠올라 또 우리 두뇌는 무언가를 봅니다.
매 순간 이 모든 것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번뇌라는 것을 알아채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매 순간 소리의 나타남과 사라짐, 생각이 들어옴과 사라짐 등을 알아챕니다. 호흡처럼 들숨도 계속되지 않고 날숨도 계속되지 않고 순간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이런 수행법을 위빠사나 또는 “관(觀)”이라고 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는 말은 위빠사나에 연결됩니다. 작고 짧은 변화로부터 점점 더 길고 굵은 변화들로 확장해 들어가면, 결국 이 몸도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만물이 모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걸 알아챕니다. 그런 수행의 결과로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삼법인 중 하나를 받아들입니다. 만물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깨고 “만물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앎이 바로 고요함입니다.
사마타 또는 “지(止)”란 수행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체의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자꾸 하게 되면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관”으로 모두 알아챌 수 없습니다. 무의식이 자꾸 반응하게 되거든요. 무의식까지 잠재우려면 단순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곳에 생각을 집중하여 다른 정보를 차단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합니다. 화두를 트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다른 외부의 정보를 차단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생각을 한 곳에만 의도적으로 집중합니다. 번뇌를 차단하고 고요함에 이르고자 합니다. 생각 자체가 번뇌입니다. 번뇌는 또 다른 번뇌를 불러 일으킵니다. 아주 어려운 수행법입니다.
열반경 사구계는 제행무상으로 시작합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이 몸도 만물도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반복하는데, 나고 죽음이 사라지면 적멸 즉, 열반입니다. 그것을 “즐거움”이라 합니다.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면 몸이나 만물 그 자체는 생멸하기 때문에 도가 아닙니다. 위빠사나든 사마타든 도에 입문하는 방편일 뿐 거기에는 도가 없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한 배에 불과하므로 강을 건넜으면 버려야 합니다. 그 배도 만물이므로 “제행무상”입니다. 공부할 때 책이 필요한 것이지 공부가 끝나면 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끝나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거기부터 도가 시작합니다.
2016년 9월 20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