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비유로서 이해된다.

by 송창록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의 시작을 건드렸다면 칼 막스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건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둘은 자본주의의 같은 면을 다르게 들여야 보았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관점의 다름입니다. 둘을 다 읽고 나면 이 양반들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자본을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주입식 교육에서 배운 키워드 몇 개로 애덤 스미스를 판단하기에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매우 넓습니다. 문장 몇 개를 발췌하여 암기한다고 애덤 스미스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에 대한 이해는 사상가가 가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나가는지. 인식의 시간성과 공간성에 공감에 이르러야만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온전한 그대로가 아닌 나의 두뇌에서 메타인지를 통해 가공되어 재탄생한 인식으로 말입니다. 비록 애덤 스미스는 하나이지만, 현실에서는 저마다의 애덤 스미스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개인’을 이해하려고 해도 그 특정한 ‘개인’의 전체를 있는 그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나와 연결되어 특수하게 구성된 특정한 ‘개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 구성된 ‘개인’은 원래부터 존재한 ‘개인’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래의 ‘개인’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나’들이 만든 ‘개인’이 중첩된다고 해서 그 중첩된 ‘개인’이 원래의 ‘개인’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원래의 ‘개인’과 다를 수도 없습니다.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 관계를 실상이 비친 거울의 이미지로 비유한다면, 다양한 ‘나’들이 구성한 모든 ‘개인’은 원래 존재한 ‘개인’의 거울 이미지입니다. 하늘에는 실체인 ‘달’이 오직 하나 뿐이지만, 천 개의 강에는 그 강마다 제각각 특수한 천 개의 ‘달’이 비칩니다. 이런 관계를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세종은 이를 찬탄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짓게 하였습니다. “한 개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노래”


의상조사법성계의 한 구절입니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 함시방 일체진중 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 즉일념 일념즉시 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하나 중에 일체가 있고 여럿 중에 중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일체이고 여럿이 하나이다.

한 개의 티끌 중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도 또한 이와 같다.

무량 겁이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즉시 무량 겁이다.

세상의 진리는 오직 비유로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메타인지의 Core Function입니다. 비유는 관계성과 관련성을 입체화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이 가진 두뇌 활동의 정점입니다. 비유 과정을 이해하면 모든 발명은 결국 발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깨달음은 본래 깨달아 있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채는 것뿐이라는 것도.

2017년 5월 8일 독서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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