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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07. 2020

시와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께

<영화와 시>를 읽고

밤늦은 시간, 피곤함과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거리낌 없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삶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영웅적인 결단보다 사소한 일을 실행하고 만끽하는 일이 더 힘들며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시에서 구제하려고 했던 일상이었다.




 우리는 시를 통해 무엇을 구제하려고 하는가. 나의 경우 그것은 나의 영혼이었고, 내 생에 나를 단단히 고정시켜 줄 수 있는 중력이었다. 그것이 나의 발끝이든, 닻을 내릴 곳이 없어 방황하던 나의 마음이든.





 <시와 산책>을 읽고 결심했다. 시간의흐름에서 <말들의 흐름>으로 기획한 10권의 책을 모두 읽겠다고. 곧바로 뒤이어서 읽은 책은 정지돈 <영화와 시>. 영화도 시도 사랑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읽고 싶은, 또 읽어야 할 책은 많아서 완독까지는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확신이 필요한 편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것은 책 전반에 깔려있는 유머였다. 책을 읽다가 웃음이 터져나오는 건 오랜만에 하는 경험이었다. 





시는 두 장의 페이지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시를 사랑한다. 그림도 사랑한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시를 만나 감상하고 있으면 그저 황홀해지고 다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내면의 평화를 얻고 만다. 하지만 시를 쥐뿔도 모른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맞아, 부끄럽지만 정말 하나도 몰라. 감상하는데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요즘 연말 기념으로 대폭 방 정리를 하면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고 있다. 버릴지 말지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훑어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정리 대상에는 초등학생일 적에 숙제로 작성했던 여러 권의 일기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동시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시를 지었던 기억은 있었지만 숙제로 열심히 작성해서 담임선생님께 보여드렸던 건 왜 까맣게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 아마 장수를 채우기 위해서 어거지로 지어내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렸을 때 즐겨하던 일을 지금 더는 하지 않는다는 건 꽤 씁쓸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책에서 등장한 <현대 시작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너무 두껍고 어렵지만 않으면! 공연히 아빠에게 딸이 장차 문학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헛된 희망만 안겨주고 말았다. (아빠는 아직도 그때 내가 지은 시 한 구절을 읊고 다닌다.)


 



 가까이 하기에는 멀고 먼 시와 달리, 영화는 누구든 쉽게, 어느 때보다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예술작품인 것 같다. 이 책에서 발견한 영화와 관련된 소소한 TMI들이 재밌었다. 이를테면, 시인 존 조르노가 자는 장면만 5시간 20분동안 나오는 영화가 상영된 적 있었고, 분노한 관객들은 환불을 요구했다는 것. 역시 나는 영화도 쥐뿔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가까운 듯 멀고 먼 시와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솔직담백한 입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의 구절이 참 좋았다. 요즘 내가 유지하고 싶은 일상이다. "자신만의 시공에 존재하기."





 브로드스키의 방식은 사람들 사이로 점점 퍼져나갔다. 다시 말해 
(1)사회의 전형적인 롤모델을 따르지도 않고 
(2) 사회를 비판하거나 저항하지도 않으며 
(3)자신만의 시공에 존재하기.
시인 크리불린은 자신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재밌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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