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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08. 2020

커피도 담배도 싫어하지만 <커피와 담배>를 읽고

 먼저 따뜻하고 둥근 잔을 손으로 감싸서 온기를 느끼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모금 마시고. 그 폭신한 구름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런 다음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손바닥에 눈물이 차오른다. 커피값을 줄이라니, 정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시간의흐름 출판사에서 기획한 '말들의 흐름' 열 권을 모두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커피와 담배>는 읽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카페인이 몸에 안 받아서(혹은 너무 잘 받아서) 커피를 못 마시고 담배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은 한국 땅에서 살기 참 어렵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길게 살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으나, 초면에 "저 커피 못 마셔요"를 몇 번 말해야 하는지, 남들이 내 체질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그것도 아주 여러 차례 말해야 한다. 말을 아예 꺼내기 어려운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런 날에는, 조금 마시는 척을 하고 집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잠들고 싶은 밤을 지새우는 거지 뭐. 어느 카페나 카페인 없는 허브티를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내 눈은 늘 바쁘고, 어쩌다 윗사람이 사주는데 아메리카노는 대폭 할인해도 다른 종류는 꽤 가격이 있는 경우 혼자 민망해서 진땀을 흘린다.




 커피를 왜 못 마시냐고?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빨리 뛰고 밤에는 잠에 들지 못한다. 그냥 잠에 못 드는 게 아니라, 고도 각성 상태에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




 담배연기도 날 비슷하게 머리 아프게, 고통스럽게 만든다. 특히 요즘은 골목길에서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산책하고 있으면 꼭 담배연기를 휘휘 날리는 빌런들과 마주치곤 한다. 출근길도 예외는 아니므로 나는 매우 분노하고 만다. 평화롭고 고요하던 내 잔잔한 소요에 돌을 던지는 그 빌런들.. 행복하던 내 기분을 단박에 추락시키는 그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외에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담배 연기를 들이마쉬며 뻘쭘하게 서있어야 하는 순간, 여름에 기분 좋게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들어오는 담배연기에 질색하며 창문을 닫고 룸스프레이를 뿌려야 하던 장면들이 쌓이고 쌓여 담배에 대한 내 적개심은 계속 커져만 갔다.





 커피와 담배를 싫어하는 내가 <커피와 담배>를 읽게 된 건 다음의 구절 때문이었다. 




  이십대 후반, 나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고, 돌이킬 수 없이 망했다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가능한 한 한국을 떠나 있는 것이었다. 그래야 숨이라도 쉬어지니까. 




 이렇게 공감이 갈 수가, 딱 내가 요즘 느끼는 바다. 게다가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니, 저자가 내 오랜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읽어야만 해! 생각했고, 의외로 공감을 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대상이 커피와 담배는 아니지만, 내게도 그와 같은 존재들이 있기에. 참,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꼭지 중 내가 가장 좋았던 꼭지는 마지막의 <커피와 담배>이다.




 시간의 흐름 시리즈를 읽다 보면, 저자들의 인생이야기가 참 다채롭고도 신비하다 싶다. 나는 왜 이렇게 밋밋한 인생을 살았나 싶고 나도 바람만 불어도 마음이 쓰라린 사람인데 내 방황의 계절은 어디있나,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방황인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책에도 여의도 퇴근길에 형광색 비키니를 입고 단편영화를 찍던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모르겠지만 꼭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좋았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인생의 포커스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로 맞춰졌다. 그전까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카페에 갔으면서 에스프레소는 주문하면서 몇백 원 비싼 아메리카노는 차마 주문하지 못하는 가난한 마음.

 나는 그 몇백 원짜리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왔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이 되어도, 먼 미래에도, 타히티에 간다 해도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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