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은 Jun 17. 2020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우리를 위한 책

<내 아이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리콜랭 저


각이 늘 너무 많은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신간.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의 저자여서 믿고, 희망도서 신청을 했고, 공부하듯 후루룩 읽었다. 요즘 읽으려고 쌓아놓은 책들이 많지만, 그중에 최우선순위로.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다음의 구절이 자꾸 생각났다. 


그 말을 읽는 순간 나는 한평생을 다시 살았다.
-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저



 이 책을 읽으면서 한평생을 다시 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출생부터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늘 이방인같이 느껴졌고 왜 사람들은 그렇게 차고 매정하고 진실되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수업시간은 지루하고, 또래 친구들은 너무 바보같고,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교사들과 마찰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덜 미워하고 됐고, 어리석고 부끄러운 과거를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었다.



 내가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는 것을 안 지는 몇 년이 되었으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만 제공했다뿐 내 삶은 그 이후로도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몇 없었다. 사실 내가 어린시절부터 부모가 이런 나 자신의 성향으로 이해하고, 나의 보호자 역할을 했어야 했지만, 감정적으로 나보다도 미성숙했던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니 내가 뭘 바라겠는가. 




 그래서 나 자신을 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래의 아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의 부모님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나를 지킬 여력도 능력도 없으므로 나는 더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는 데는 충분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다음의 구절처럼, 나는 "충분히 엄청난 학대"를 가정과 학교, 그리고 학원에서 당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부적격자이거나 머저리라서 학대를 당한 게 아니라고 이 책이 섭섭치 않을 정도로 설명해준다는 것. 이 책에 따르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십중팔구 학교폭력을 당할 위험이 있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 아이들이 허구한 날 시달리는 비판과 꾸중이 쌓이고 쌓이면 그 자체로 충분히 엄청난 학대가 된다. 학교 친구들의 놀림은 또 다른 학대이고, 여기에 학교 폭력 문제가 따라올 수도 있다. 수치에 가장 잘 맞서는 방어책은 아이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에 자부심을 가질 권리를 되돌려주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 또한 외부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얘는 원래 그렇습니다. 그건 아이 성격이에요. 얘는 일부러 당돌하게 굴거나 말은 안 듣는 게 아니에요. 다른 아이들처럼 사회적 규칙을 빨리 파악하지 못할 뿐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를 체벌했고, 비난했고, 경멸의 시선으로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여전히 권위적인 어른이(그 권위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섭고, 이 세상이 어떤 규칙으로(나만 빼놓고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굴러가는지 모르는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어렵다. 사는 게 너무 숨이 가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나의 성향 때문이었구나, 하고 이제야 온전히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예전부터 인간이 다 평등하게 권리를 갖고 존중받을 의무가 있음에도 왜 선생님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왜 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여전히 예의바르게 처신해야 하는지, 상사가 선을 넘었어도 나는 현명하게 비굴한 행태를 보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비굴과 겸손, 예의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 왜 앞뒤 다른 말을, 비논리적인 말을 듣고 이해하는 척 해야하는지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논리 체계가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는 소통이 불가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제야 내 행동이 이상했다는 걸 깨달은 것도 몇 있다. 나는 수업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같은 얘기를 왜 반복하냐고!) 책을 읽고, 몇 구절씩 건너뛰어서 미리 읽고, 문제도 몇 장을 미리 풀고, 과제를 제출할 때도 제출 접수 시작하자마자 하곤 했는데. 우리가 박쥐도 해파리도 아닌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암시로 일과 행동을 지시하는 행태도 너무나도 싫다. 말로 지시 못할 정도로 비합리적인 일을 시키려는 거면 직장에 문제가 있는 거고, 말로 지시를 못하는 사람인 거면 그 사람의 의사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 나는 예전부터 인사를 안 한다고 욕을 많이 먹었는데, 나는 아무 의미없는 그 말을 왜 하는지(진심도 아니면서)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욕을 바가지로 먹고 돌이킬 수없다는 걸 안 다음인 이제야 하게 되었지만. 또 인사치레로 하는 말, 스몰톡에도 엄청 약한데, 이 책에 용건이 있을 때에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사물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이런 류의 문제 제기는 끝도 없이 할 수 있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글쓰기가 어렵다는 점도 짚어주어서 좋았다. 나는 글을 쓸 때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튀어 올라서 몇 문장씩만 구성된 문단이 한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많이도 아니고)조금 아쉬웠던 점은 학교 폭력에 대한 챕터였다. 책에 완성도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단지 프랑스 학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한국의 독자로서는 썩 와닿지 않았다. 책에서 제시하는 조언이 그렇게 실질적인지도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홈스쿨링, 대안학교 등을 추천하기 때문이다. 또, 어른의 개입을 강하게 구장하는데, 나로서는 전혀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말로, 아이들만의 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실은 나는 내 경험을 돌이켜볼 때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어떤 유형이 있다고 생각해왔고, 어느 정도는 피해자가 부추기는 측면이 없지는 않나 싶었는데 이 책에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해 줬다.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어떤 유형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피해자는 다름 아닌 선량하고 착한 모범생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그것 참 마음에 놓이는구만. 나는 어수룩하고, 정이 지나칠 정도로 많고 공격성이 없다시피 해서 소위 말하는 찌질이 부류에 속했는데,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싫고 아이들이 쿨하게 생각하지 않을만 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위로가 되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성적이 썩 좋지 않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급에서 거의 나밖게 공부하지 않는 분위기, 떠들썩하고 나를 비웃고 깔보는 분위기에서 학습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려웠다. 담임선생 마저도 시끄럽다고 자습시간에 안 들어오고, 미리 다른 교실(합반 자습실)에 가 있으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넌 어떻게 그렇게 너만 생각하니?" 하며 힐난의 시선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선생을 진심으로 증오한다. 다름 아닌 그의 멍청함 때문에.(본인만을 생각하는 건 다른 담임 모두 들어오는 자습시간에 시끄럽다고 안 들어오는 본인인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용서하기 어렵다.)




 책을 읽으면서 답답한 점도 일부분 있었다. 현재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내가 뭔가가 다르고 여기 부적격한 인간인 것 같은 느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달라도 너무 다르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내게 맞는 자리는 어디일지에 대한 의문점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는 점.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다르므로 배려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예전 내 상사가 말했듯,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실은 이런 점이 이 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신 과잉 활동인이 벼슬도 아닌데, 무작정 배려를 요청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세상은 꽃동산이 아닌데.



 웃기는 건, 부엌에서 끓는 냄새를 알아차리는 내 후각신경이나 엘레베이터 움직이는 소리로 부모님이 도착했다는 걸 미리 알아차리고, 그리고 가끔 은근슬쩍 내 욕 하는 걸 너무 잘들어버리는 이 청각신경에 대한 상기가 되었달까. 나는 말하자면, <아이 오리진스>에서 소피가 말했듯이, 홀로 빛을 감각하며 사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나에게 구원자 역할을 했다. 다음 구절처럼,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 이 책이 꼭 필요했다. 다른 정신 과잉 활동인 역시 그럴 것이다. 아무리 그들을 잘 이해하는 부모를 만났더라도, 정신 과잉 활동인으로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실은, 매번 고비를 넘는 것만 같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무지하고 폭력적인 비판과 무정에 맞서는 최고의 방패다. 자기를 잘 알아야만 남들에게 지나치게 맞추기만 하는 '거짓 자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이 함정에 평생을 발목 잡히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혹시나 정신적 과잉 활동인 모임이 있지는 않을지 인터넷에 검색해보았으나 그런 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나처럼 고통받고 있는, 비슷한 사람을 찾고 있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있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다음의 구절을 읽고 나에게 좋은 직업은 현재의 직업과는 달리 복잡한 일을 하는 것 아닐까. 논리 체계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좀 더 나랑 맞지는 않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요즘은 그게 가장 큰 관심사이다. 




복잡한 뇌에는 복잡한 일이 필요하다. 이 뇌는 다양한 형태의 까다로운 데이터를 잘 소화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낼 때 뿌듯한 행복과 짜릿한 기쁨을, 일종의 정신적 오르가슴을 맛 본다. 복잡한 뇌는 자기를 복잡하게 써먹어야 좋아한다.




<내 아이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리콜랭 저






 이 책에서는 비슷한 이유로 명상을 추천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고, 이 생각이 저 생각으로, 또 저 생각이 다른 생각들로 계속해서 튀기 때문에 수면에 어려움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잠에 드는 과정이 너무 재미가 없다. 그래서 그때는 명상 어플을 이용해서 명상을 하고, 그게 그렇게 도움이 된다. 이 책에 있는 완벽주의에 관련한 설명도 도움과 위로가 됐다. 맞아, 완벽할 수는 없어.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춰야 해. 그것이 나의 최선이라고. 경험치를 먼저 쌓는 것이 우선이라고.






 사실 이 책에 대하여 쓸 말은 너무도 많은데, 이후 종종 더 추가해야 될 것 같다. 당장 <집에서 길을 잃는 이상한 여자>를 비롯해서 읽을 책이 많지만,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와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생존편>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내 행동에 실질적인 변화를 촉구할 책인 것 같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이 우리를 위로하는 방식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