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은 Jun 17. 2020

연말에 읽기 좋은 소설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올스 저

인생이 우리에게 꼭 선택지를 제공해줄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인생이 우리의 경로를 정해두고 거칠거나 섬세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서 우리가 그 길을 벗어나지 않게 감시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 성격,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바꿔놓을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었을 때 우리에게 1년이라도 여유가 주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신의 은총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나는 벨을 사랑한다. 내 일도 사랑하고, 나의 뉴욕도 사랑한다. 내가 이것들을 택한 것이 옳았다는 생각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올바른 선택이란 원래 인생이 상실을 결정화시키는 수단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 <우아한 연인> 518p, 에이모 토올스





얼마전 고시를 준비하다가 그만두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친구를 만났다.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문득 가장 안전한 길을 쫓아온 내 선택들이 부끄러워졌다. 나도 막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공부가 내 길이라고 생각했고, 고시를 하거나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7년 동안 고시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취업하려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대학원이 너무 힘들어서 마음이 무너지던 선배들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그만큼 간절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시험이(그리고 공부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걸 너무 무섭게 느낀 나는 4년 안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걸 목표로 하고, 또 그 목표를 이뤘다. 딱히 대단한 목표도, 이정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조례 시간에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른들이 대부분 하는 말들을 들으면 그나마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별것도 아닌 말이 나한테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나는 인생을 고속도로인 것처럼 살았고, 정해진 길 안으로만 걷고, 최대한 제도권 내에 속해있고 싶었다. 그러다가 첫 직장을 퇴사하면서 갑자기 내가 고속도로가 아니라 사막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길에 다다를 줄 알았고, 하루의 열심만이 나를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속해야 마땅한 곳'에 올려놔줄 것 같았다.


나의 이상향은 어디 있을까?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를 따라서 차례로 간호사, 그리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글을 읽고 쓰면서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피아니스트, 머리가 크면서는 검사가 되고 싶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크고, 더 넓은 세상을 맞닦뜨리면서 자꾸만 위험요소가 적은 곳으로 내 발 디딜 곳을 한정지었다. 그러면서 나는 딱히 꿈이 없어진 것 같다.


나를 다시 찾고, 미래의 나를 다시 그려보고 있다. 좋은 위로가 되고,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삶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기를 기대하며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에이모 토올스의 <우아한 연인>를 읽으며 하루하루 가는 것이 아쉽고 붙잡고만 싶은 내 젊은 날을 뒤돌아보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해보았다.('나도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을 나도 모르게 질투하게 될까? 그들의 젊음이 눈부시게 느껴질까?..') 여주인공이 나오면 주로 하는 것처럼 케이티와 나를 비교해보기도하고.


나는 케이티처럼 똑부러지기는커녕 물러터졌고, 운도 좋아서 상속으로 연금을 받게 해줄 친구도 만날 수 없겠지만,



"경탄하는 능력이라니!"

"그래, 순수하게 경탄하는 능력. 누구든 돈만 있으면 차를 살 수 있고,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콩 껍질을 벗기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하지만 1천명에 한 명쯤은 놀라움을 다음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고 빙충맞게 입을 쩍 벌리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잠자리 날개나 구두닦이의 사연 같은 것에 감탄하는 걸 말하는 거야.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시간을 걸어가는 것." - <우아한 연인> 441p, 에이모 토올스




읽는 내내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아렸던 팅커처럼 "순수하게 경탄하는 능력"은 연습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존재하고, 이 순간에 충실할 것.                 



매거진의 이전글 어렸던 나날들에 대한 달콤쌉쌀한 회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