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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Mar 29. 2021

걸어서 출퇴근하는 즐거움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 7. 걷는 동안은 다 괜찮아

 나는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 노래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고 있자면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저만치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 내가 느리긴 느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운동 효과라고는 조금도 없을 이 느린 소요는 내 마음의 안식이며 언제나 큰 즐거움이다. 물론, 몸이 크게 좋지 않을 때를 제외하면. 





 빠르게 걷는 일에는 낭만이 없다. 나는 언제나 지나치게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 영혼이 나를 뒤쫓아올 틈을 주지 않는 것 같다고 할까. 영혼과 속도에 대해서 말하자니 생각나는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올카 토카르축 작가가 지은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그림책이다. 이 책은 내용을 알면서도 계속 펼쳐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데, 틀에 박힌 일상 속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느날 자기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병원에서 진료를 본 뒤,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그가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것. 이후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려고 한없이 고요하게 기다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영혼과 조우하게 된다.





 어쨌든, 이렇게 천천히 걷는 행위에는 목적지가 크게 중요치 않다. 걷는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크니까. 나는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세울 만큼 힘들었던 첫 직장생활에도 대부분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걸을만한 였고, 내가 심한 멀미 탓에 잠깐 버스를 타는 것도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걸어서 출근할 준비를 하다보면, 끔찍할 것이 뻔한 하루 일과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삭막한 출퇴근길이었지만 유난히 장미덩굴로 뒤덮인 담장을 지나갈 때는 한없이 장미를 감상할 수 있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운 좋게도 훨씬 풍요로운 출퇴근길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이유로 출근과 퇴근을 각각 다른 길로 하는데, 출근할 때는 여러 아파트 단지와 두 개의 초등학교, 또 3개의 놀이터를 지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는 늘 퇴근할 때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는 할머니를 마주치곤 했었는데, 그러면 직장에서 일어났던 이런저런 일들로 번잡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곤 했다. 요 근래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출근하려고 남의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다가 경비원 아저씨와 가끔 인사를(유난히 친근하게 나에게 인사를 건네시는 걸 보면 내가 그 아파트 주민인 줄 아시는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조금 찔린다) 하곤 한다.






 요즘 나의 출퇴근길을 특별히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늘 녹색 꽃눈만 보여주다가 천천히 만개하고만 목련과 벚꽃이다. 하얀 목련을 보면 팝콘이 생각나서 입에 침이 고인다. 오리지널 팝콘은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서 싫어하면서도 그렇다. (나는 치즈 팝콘만 취급한다.) 또, 나의 직장 근처에는 유난스러울만큼 벚꽃이 만개했는데, 따로 벚꽃 구경을 갈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것만 같은 꽃길의 풍경이 연출되어 직장 일로 심란했던 마음이 기쁨으로 차오른다. 꽃나무가 이런 일을 해낸다. 이러니 가로수가, 또 도시 내 조성된 공원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귀한지.






 이어폰 없이는 밖을 나서지 않는 사람으로서 출퇴근을 함께하는 오디오 역시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평소에는 매우 잔잔하다 못해 약간은 우울한 노래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출근과 퇴근에는 아주 강력하게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봤자 누구보다 천천히 걸을 것이지만, 누구도 나를 멈출 수 없는 강력한 리듬, 또 활력이 필요한데, 부끄러우니까 플레이리스트는 공개하지 못하지만, 팟캐스트는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다. 너무도 입소문을 많이 타고 있는 <씨네마운틴>. 영화감독, 작가, 배우들이 먼 길을 돌고 돌아 너무도 타고나게 자기 자리를 찾아서 그 배역, 각본, 연출을 마침내 소화해내는 그 일대기가 가장 즐겁다. 시도 때도 없이 샛길로 빠지고, 노래를 부르는 장항준 감독과 송은이 PD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화가 나고 속상하다가도 실없는 농담에 어느새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팟캐스트를 강력하게 추천한다.(참고로 유투브로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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