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비헤이비어> 감상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가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평이 아주 좋은 영화(바로 이런 영화)는 예고편도 절대 안 본다. 처음에는 미스비/헤이비어 인줄 알고 이게 무슨 제목일지, "비어"가 맥주인지 한참 고민했는데, 미스/비헤이비어 였다. 코로나19가 기승인 것도 그렇고, 폼롤러로 마사지를 하며 영화나 드라마를 집에서 보는 거에 재미가 들린 나는 장장 두시간에 달하는 시간동안 깜깜한 곳에 마스크를 쓴 채 갇혀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으나.. 무료영화 쿠폰도 있고 해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집에 있으면 한 영화를 한 번에 끝까지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을 떠나서 기분전환할 게 필요했다. 요즘 집에서 두문불출하다보니, 책이며 영화며 공원으로의 산책이며 날 충분히 즐겁게 해주고는 있지만 주말이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나의 휴식시간을 도둑맞은 채 일터로 복귀하는 기분이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다.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샐리와 엄마의 말다툼 장면. 주로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사 및 돌봄 노동을 저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또 여성들 또한 그런 함정에 종종 빠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아무도 엄마처럼, 엄마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너무나도 공감하면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란 걸 알기에. 나도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남자들과 똑같이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자라났고, 또 지금도 살고 있으므로. (물론 문화적으로 강요되고 학습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엄마는 집에서 온갖 감정 및 가사 노동, 그리고 돌봄 노동을 기쁘게(?!) 떠맡고, 현실에 순응하여 사는데 나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서 산발적으로 그 분노를 마구잡이로 쏟아내곤 했다. 애꿎은 엄마는 괜히 이중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 시절의 여성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했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여성 혐오적 발언을 유머랍시고 쏟아내는 Bob Hope에게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Shame on you!" 하고 외칠 때, 또 한 번 울었다. 몸무게가 몇이냐는 둥 품평당할 때, 팀에 알바생 뽑을 때 여자로, 사진도 반드시 제출하고 얼굴보고 뽑으라는 말을 선배에게 들을 때, 소모품 구매나 커피 내리고 간식을 분배하는 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떠맡을 때, 남성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여성성을 강요당할 때, 본인을 오빠라고 칭하는 남성 상사에게 한 마디 대꾸하지 못하고 웃을 때.. 진지하게 일대일 상담하는 자리에서 남성 팀장에게 결혼하여 여성의 삶을 사는 것 또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을 때 등 나에게 "Shame on you!"라고 외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러나 너무 많은 이유로 그런 것은 불가능하고,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이 없을지 아직까지도 고민 중이다. 나는 왜 이렇게 미련스러운지. 생각이 많고, 불안한 게 많고, 무엇보다 아주 현실적이고 미움받는 게 싫어서, 체제에 순응하고 싶어서 아주 소극적으로만 행동하는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답답하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보고 오길 참 잘했던 영화. 날씨도 구렸는데, 영화관에 있길 참 잘했어. 샐리와 제니퍼의 대화 장면, 샐리가 여성 노동자의 관점으로 논문을 집필하겠다고 했을 때 "더 넓은" 주제를 다루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하던 교수와의 토론 장면.. 모두 주옥같았다. 딱 지금 시기에 필요한 영화라는 생가이 들었으나, 1970년으로부터 50년이 흘렀는데 크게 변한게 없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좀 난다. 이 모든 것이 바뀌긴 할런지.. 이 영화를 보고 "가부장제"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고, 나의 온전한 시선을 갖고, 온전한 나의 두 다리로 서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한다는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왓챠플레이에서 "와이 우먼 킬"을 즐겁게 보고 있다. 이것도 다 읽은 다음에 후기를 남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