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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un 17. 2020

따뜻하고 포근한 위로가 되는 소설책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올스 저

1. 읽게 된 계기

두께를 보고 도서관에서 빌려읽을 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연장이 안 되기 때문. 

예상치 못한 경로로 선물을 받았다. 덕분에 읽게 된 책이다.

실제로 앞부분을 조금 읽고는(좋은 책, 다시 말해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라고 판단했음에도) 한참을 두었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2. 책을 읽는 동안

두꺼운 책을 아주 조금씩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언제 읽으려나 조바심 내지 않고 즐겁게 조금씩. 맛잇는 케이크를 티스푼으로 조금씩 맛보듯이.

주로 책은 출근 전 혹은 퇴근 후에 읽는데, 직장에서 업무를 하다가도, 집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 책을 생각하며 즐거웠다.

나는 폐쇄된, 혹은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굉장히 괴로워하는데, (그래서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본 적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가장 첫 부분에에 연금형을 선고받은 이 소설을 읽는데 괴로움은 전혀 없었다. 이야기며 주인공의 사고가 굉장히 넓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책의 주된 배경이 되는 메트로폴 호텔 역시 (비교적으로)하나의 다채로운 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남성 중심의, 남성이 집필한, 남성 시각의 이야기가 (이미) 아주 많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책들을 많이 보고 자랐다. 90년대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나의 이야기와 시선, 역할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의식적으로라도 여성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편이다. 왜 내가 이 시점에 "신사", 그것도 러시아의 신사 이야기를 읽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읽는 내내 내게는 위안과 즐거움, 그리고 교훈을 모두 선물처럼 안겨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약간 날이 쌀쌀해지는 환절기에 이 책을 읽은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나, 밖에 나가기가 망설여지고, 집에 돌아온 이후에 큰 한숨을 내쉬며 몸을 녹여야하는 겨울날 읽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3. 번역

무서운 기후의 러시아 배경인 이 소설이 이토록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진 것은 번역 덕이기도 했다. 그의 번역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감사합니다.

번역가 님이 책 뒷부분에 짧게 쓴 후기글이 좋았다. 작가의 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하면 오만일까? 어쩐지 주인공인 신사의 모습을 작가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예감이 조금 맞는 듯했다.

4. 읽은 후 느낀점

작가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다소 놀랐다. 얼마간 이런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이토록 소중한 이야기라니, 역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길 반복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용기와 좌절을 동시에 주는 책이랄까. 

긴 소설을 읽을 때에 좋은 것은, 특히나 이렇게 호흡이 짧지 않은 소설이란, 그 소설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여 인물들과 같은 속도로 호흡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잊고 새로이 빠져든 세계를 배회하는데, 그러면서 이미 알았거나 몰랐던 나의 어떤 모습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마법같은 시간이 허용되므로 우리는 자꾸만 새로운 소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교양이란 무엇일까, 허영과 예의, 의식과 외식 등의 차이와 경계를 구분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확한 정도의 배려와 섬세함의 기술을 볼 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신사가 보여주었던 니나와 소피야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다소 음울했던 유년시절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이 온전한 존중의 사랑에 놀랄 수밖에.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종종 의구심을 섞어 생각해보곤 했다. 작가는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그 사랑을 보여준다. 

책의 주된 주제인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하고야 만다"는 언제나 갇혀있는 것만 같고 담장 밖, 우물 밖으로 탈출하여 세계를 마주하고 싶던 나로서는 더욱 와닿았다. 그래서 이 사랑스러운 신사가 늘 지녀(켜)왔던 삶의 자세에 용기와 결단력, 포용과 사랑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던 그의 삶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본 사람들을 다시 신사를 존경하고, 또 사랑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랬듯이.

5.인상깊은 구절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p52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p65

"내가 저기에 있고, 저 숙녀가 여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백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인류에겐 적당한 정도의 슬픔이 있단다. p101

"그냥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니나가 너무 열정적으로, 너무 자신있게, 너무 외곬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니 그애에게서 유머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 애는 마치 불굴의 모험가처럼 북극 만년설 위에 깃발을 꽂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애의 행복이 그곳과는 전혀 다른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p303

당연히 백작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삶의 상황이 우리 자신의 꿈을 추구하지 못하게 할 경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꿈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p529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셰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음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p609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p630 

#책추천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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