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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Sep 20. 2021

영영 전하지 않을 편지 #3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봤는데, 되게 반갑더라구. 왜 꿈에서 꼭 한번 봤으면 싶을 때는 얼굴을 안 보여주고, 뜬금없게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는지 모르겠어. 아예 떨쳐내지도 못하게. 여전히 사랑스러웠어.


실은 이 긴긴 연휴, 마음이 혼잡스럽고 어디 하나에 집중할 수 없이 가을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 책도 읽히지가 않고 영화도 별로 재미가 없어서 억지로 나를 앉혀놔야 해.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서 달리기를 하고, 혼자 먹더라도 밥을 찌고 계란을 삶고 고기를 굽고 국을 따뜻하게 끓이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자기 전에는 스트레칭을 하는 이 모든 일과가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러워. 그래서 습관이 무서운 건가봐. 서로가 습관이 되어버리기 전에 일찍 끊어진 것, 다행인 것 같아.


그런데 이 모든 감정, 생각, 상황, 이것들은 다 때가 있는 거잖아. 그래서 잠깐이라도 다시 만나기 싫은 거거든. 시간은 흘렀고, 나는 변했고, 감정은 그때와 같지 않을 테니까. 아주 조금 후회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매순간 그때에만 유효한 마음들은 모두 쏟아낼걸, 하고. 나는 재지도 계산하지도 않는 투명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근데 내가 전혀 그런 사람이 못 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요즘 의심하게 됐어.


별건 아니고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끊어진 관계가 있거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어디가 눈에 안 찼는지, 갑자기 정이 떨어진 건지, 다른 사람이 생긴 건지 등등. 생각을 끊을 수가 없고 마음은 조금 무너져내렸어. 생각보다 내가 걔를 많이 좋아했다는 것도 새삼, 이제야, 뒤늦게 알게 됐고. 그런데 꿈에서 널 보니까, 다 괜찮은 거야. 


예전에는 힘들면 집이 그립고, 엄마가 보고싶었거든. 근데 이제는 네가 생각나. 성인이 되어서야 만난, 완전한 타인이면서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던 그때, 나도 내게서 고개를 돌릴 때 날 좋게만 봐준 사람이 있었지, 받는 거 하나도 없이 주기만 했던 성품이 사랑스럽고 다정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하고.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는데, 내가 왜 갑자기 차갑게 돌아선 사람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나. 갑자기 다시 너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나고, 지난 며칠간 마음을 단단히 싸매려고 애쓰던 게 조금 의미없어졌어.


그래,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그때 내가 받았던 그런 애정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몰라. 결국은 후회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알다시피, 사람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잖아? 돌아가도 나는 정확히 똑같이 행동할 거야.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하고 백 번 고민해보아도, 그러려면 내 훨씬 더 과거로 돌아가서 너무 많은 걸 바꿔야 해. 아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만 해. 그런 건 불가능하잖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어. 내가 이런 사랑을, 이런 사람을, 이런 서사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모든 관계는 유일무이한 서사고, 하나하나가 특별하잖아. 되풀이할 수가 없는. 그런데 반드시 나타나더라. 새롭고, 또 다르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이. 그러니까 나도 이쯤에서 어렵지 않게 마음을 정리할래. 


결국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잊을 수 있다지만, 우선은 내 일상을 빼곡히 채워넣는 게 중요하겠지.

나는 요즘 한 사람 생각만 하느라 써지지 않던 글을 다시 쓰고, 미리 결제해둔 영화를 보고, 책도 읽으려고. 계속 생각은 다시 한 곳으로 향하겠지만. 참 이상하지? 내 모든 신경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홀라당 가있다는 게. 이것도 즐기려고 해. 오직 현재만 가능한 감정이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제 완연한 가을이야. 씻고 나오면 아, 살 것 같은 게 아니라 너무 썰렁하게 추워서 얼른 긴 팔 긴 바지 잠옷을 입어야 해. 수면양말까지 신고. 외출할 때 가디건을 꼭 걸쳐야 하고, 너무 이른 아침에 나가면 추우니까 스트레칭을 슬슬하다가 달리기를 하러 나가지. 예전에는 너무 더워지면 힘들까봐 얼른 뛰쳐나갔는데. 몇 번을 맞아들여도 마음 속까지 스며드는 이 찬 공기가 늘 새롭고 설레. 


왠지 너는 엄청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아. 물론 반드시 그래야만 해. 내 이름 석자가 가물가물할 만큼 내 생각은 하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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