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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04. 2021

오늘의 일기 - 아침 달리기, 그리고 전시회 추천

2021.10/3(일)의 기록

 또 하루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 꽤 보람찼던 하루이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있어 감상을 남겨놓으려고 한다. 실은 요즘 글을 너무 안 써서, 내가 발을 딛고 나아갈 땅이 좁아진 느낌이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잠깐 앉아서 내 마음 보따리를 풀어내리는 중. 오늘 아침에 글을 좀 쓰고 싶었는데, 견딜 수 없이 서촌에 가고 싶어서―그 기운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오늘은 달리는 날이었다. 기상이나 내 신상에 이변이 있지 않는 한 격일로 뛰고 있고, 금요일에 뛰었으므로 오늘은 뛰어야 했다. 이제는 휴일 아침 달리기 전에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목과 어깨, 다리를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잠깐 늦장부리는 사이에 해가 너무 떠올라서 뜨거워지면 어떡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이, 7시 30분쯤부터 달려도 충분하다. 그래도 아직은 반팔만 입고 나가도 충분하다. 집을 나서는 내게 아빠가 말했듯, 운동하기 제일 좋은 날씨다. 이런 날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된다.





 4월부터 뛰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페이스가 꽤 좋아졌다. 한 바퀴에 10분씩, 총 세 바퀴. 이제는 30분에 세 바퀴를 꼭 맞춰서 뛸 수 있다. 익숙해져서이기도 하지만, 무릎보호대를 착용했기 때문. 꼭 무릎이 아파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추천하고 싶은데, 자세를 잘 잡아주는 효과가 있어 부상을 예방할 수 있다. 착용한 날과 안 한 날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금요일 밤에 비가 하도 내려서 토요일 아침만 해도 솔방울이며 나뭇잎이 사정없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 누가 쓸었는지 길이 꽤 말끔했다. 분명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별로 기력이 없어서 뛸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여전히 세 바퀴째가 가장 힘차고 신났다. 그래도 아직 네 바퀴는 도전 못하고 있다. 두렵기도 하고, 무리는 안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기록을 위해서 달리는 게 아니니까. 그저 반복되는 내 일상에 달리기를 녹이고 싶은 거다.

 



 

 지하철을 타고 서촌을 오가는 동안 박연준 시인의 산문 <쓰는 기분>을 틈틈히 읽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이렇게 내게 꼭 알맞을 수가, 연신 감탄하며. 곧 이 책에 대한 감상은 따로 남기겠지만, 오고 가며 읽기에 딱 좋은 만듦새이다. 깊이 있으면서, 너무 깊어서 빠지면 어떡하나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런 깊이는 아니고, 딱 안온하고 좋다며 편안하게 잠겨서 물장구도 칠 수 있을 만큼의 깊이 있음. 




 서촌에 가고 싶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 바로 전시회다. 갤러리현대는 예약을 미리 해두었고, 국제갤러리 박서보 전도 오늘 꼭 보고 싶었는데 예약이 필요한 전시여서, 다른 적당한 날에 예약을 잡아두었다.




1. 학고재 - 김현식 작가, 玄

 작품을 미리 보고갔는데도 예상치 못하게 내 마음을 강타했다. 玄이란 무엇인가.

수평으로 레진을 올리고 마른 후 칼과 송곳으로 수직선을 그린 후 물감을 바르고 다시 레진을 올려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거듭되는 작업의 결과로 무한공간이 펼쳐진다.

 현(玄)은 세계의 불가사의한 섭리를 일컫는 형용사이다. 현(玄)은 우주가 운영되는 알 수 없는 비밀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현묘하다. 적막무짐하다. 너무나 깊고 어두어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두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다만 직감할 수 있다. 그것이 현(玄)의 세계다.

― 『현(玄)』, 이진명

 요즘 반복된 작업을 요하는 예술이 좋다. 보고 있자면 작가가 들인 시간,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지 않은 더 많은 것들, 작가만 아는 시행착오와 고통의 과정이 있겠지 생각하면 겸허해진다. 확실히 정성을 쏟아넣은 작품들은 울림이 다르다. 길고 긴 여정을 통해 마침내 내 앞에서 액자 속에 담겨있는 작품을 볼 수 있어 나는 그저 행복할 뿐. 


 반복된 작업으로 '평면 속에 공간을' 쌓아 올린 그의 작품이 좋았다. 멀리에서부터 가까이서, 가까이에서 멀리서, 그리고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그 무수히 많은 선들의 아득한 깊이를 헤아려보려고 했다. 작가는 말한다. '작업에서 무수히 그어진 선들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玄의 공간을 시각화하고 싶은 나의 의지'라고. 





2. 보안여관 - 다함께 차차차

 차 도구도 좋았지만, 뒷마당에 전시된 수많은 종류의 국화들―국화가 이토록 다양하고,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일이었나―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어 기뻤다. 마침 직장동료가 주말마다 등산을 간다기에, 그만큼의 기력이 안 되는 나는 도시 속의 자연만을 감상할 수 있다고 자조하고 있었는데, 국화가 위로가 되었다. 또 중요한 것 하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즐겼다는 '국화그림자 놀이'를 해보았다. 

다산 선생은 특별히 촛불 앞의 국화 그림자를 취하였다. 
밤마다 이를 위해 담장 벽을 쓸고 등잔불을 켜고는 쓸쓸히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즐겼다. 
옷걸이와 책장 등 방 안에 물건들을 치우고 국화 화분에 촛불을 밝히면 
국화의 그림자는 너울너울 일렁여서 펄럭이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듯 
하늘거려 마치 달이 동산에서 떠오르면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그림자를 만드는 듯했다고 한다.

이렇게 무용하고 아름다울 수가. 내 영혼에 얼마나 많은 여백이 필요한지 다소 쓸쓸하고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끼며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이 전시회를 발견했다. 내 영혼이 말라죽지 않도록 물을 주는 이런 행위를 발견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귀한가. 





3. 갤러리현대 - 이건용 작가, Bodyscape 전

 큰 기대 안 했으나 역시 좋았던 전시회.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며 만든 노트나 작품을 그리는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몹시 좋아한다. 어쩌며 작품 그 자체보다도 더. 이번에도 그랬는데, "Bodyscape"라는 말마따나 온 몸을 힘껏 사용하여 그려내는 진지한 그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하얀 날개같은 작품이 특히 좋았는데, 그 작품을 위해 그는 날갯짓을 아주 많이 해야 했다. 모든 예술이, 또 인생이 그런 것 같다. 날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날갯짓을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이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직접 해야만 하는 것, 이를테면 사랑이 꼭 그렇지 않은가.





 작년 10월에 더 추워지만 산책이 어려워질까봐 열심히도 공원을 걸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한 바퀴를 돌아 새로운 10월을 지나고 있다니. 이 믿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누구에게 납득시켜달라고 할 것인가. 오늘이 10월 3일인 걸 확인하고 소름끼치게 놀랐었다. 3일간의 꿀 같은 연휴가 왔다고만 생각했지 이걸 개천절과 연결시키지는 않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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