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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09. 2021

국제갤러리 박서보 작가 개인전을 다녀와서

 박서보 작가 개인전을 보러 서촌을 다녀왔다. 지난주에 서촌에서 보고 싶은 전시회는 대부분 봤는데, 예약이 필요했던 이 전시회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박서보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보게 된 오늘, 너무 인상깊은 나머지 다음에 또 볼 수 있을지 전시 일정을 확인해보았다. 10/31일까지 열릴 예정이어서, 충분했다.





 보고 있자면 뭔가가 채워지는 기분, 내가 작품으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이는 기분이 아니라 이 작품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마음을 덜어내는 것 같은, 내가 비워지는 이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지 궁금했다.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박서보 작가의 작품 세계는 무엇일까 그제야 궁금해졌다. 갤러리 입구에 비치된 작품 설명이 왜 내가 작품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 건데, 전시된 작품은 모두 묘법 연작이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작가는 두 달 이상 물에 충분히 불린 한지 세 겹을 캔버스 위에 붙이고, 표면이 마르기 전에 흑연 심으로 이뤄진 굵은 연필로 선을 그어 나간다. 연필로 긋는 행위로 인해 젖은 한지에는 농부가 논두렁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좌우로 밀려 산과 골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물기를 말린 후 스스로 경험한 자연 경관을 담아 내기 위해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덧입힌다. 이렇게 연필로 그어내는 행위를 반복해 완성된 작품에는 축적된 시간이 덧입혀지고, 작가의 철학과 사유가 직조한 리듬이 생성된다.





 박서보 작가는 스스로의 작품을 '흡인지'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이렇게 좋을 수가. 어쩐지, 나의 지친 마음의 부스러기같은 것을 축축하게 젖었다가 연필로, 또 아크릴 물감으로 모양과 색을 입어 작품이 되었을 한지가 모조리 흡수해내는 것 같았다.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고 내게 뭘 던져내지도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휴식이 가능하다니. 가을을 닮은 그의 전시회를 삼청동 바깥 풍경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국제갤러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을 볼 기회가 저번에도 있긴 했는데, 그때는 인연이 닿지 않았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더 가고 싶다. 내 마음과 영혼이 모두 굉장히 만족했던, 사람을 고요하게 잠잠하게 행복하게 만들어줄 전시회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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