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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11. 2021

이수지 작가의 개인전, <여름협주곡> 후기

우리 자신을 예술가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더 넓은 놀이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이수지 작가, OKAPI (대만 온라인서점) 인터뷰




 이수지 그림책 작가의 개인전은 본래 9/19일까지였으나, 많은 성원에 힘입어 10/10까지 연장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연장된 덕분에 볼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알부스 갤러리도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작품을 보며 전시장에서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들을 많이 보기도 했고, 그림책 작가의 전시회니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그와 별개로 내가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이런 전시회는 데리고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즐겁고 유익했지만, 아이들에게도 생각의 영양분을 제공해주기에 너무 좋았을 전시회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알부스 갤러리의 소개말을 찾아보니,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그림들을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어쩐지! 어른과 아이에게 모두 즐거움을 줄 이런 작품, 특히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품은 작품들을 보러 알부스 갤러리를 다시 찾고 싶다.





 김지은 교수님의 평론 덕분에 전시는 더 선명하게 내 마음에 와닿을 수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벽난로의 재받이 서랍에 가루로 곱게 남은 환영(illusion)처럼 우리 스스로 삶이라는 판타지의 실체가 되어보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이수지는 순차적 선형성을 지닌 책이라는 제본된 무대 위에 이미지로 쌓은 비선형적 퍼포먼스를 올리고, 그곳에 독자를 초대하고, 독자가 책의 일부가 되는 예술적 경험을 구축한다.

이제 객석으로 입장하기만 하면 된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당신이다.

― 김지은 평론가





전시는 지하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진다. 1층에는 그림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사진 작업을, 지하 1층에서는 가수 루시드 폴과 협업하여 작업한 <물이 되는 꿈>과 <파도야 놀자>의 원화를, 2층에서는 안토니오 비발디 사계 중 <여름> 1,2,3악장에서 영감을 받은 <여름이 온다>의 원화와 신작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에서는 아이들이 여름을 쫓아 악보 위를 뛰어다닌다. 멜로디는 그들의 손 안에서 팡팡 터진다. 아이들은 뒤로 미루지 않고 여름이 주는 기쁨을 즐기기 때문에 여름 역시 그들의 영혼을 만나 기뻐하고, 지켜보는 우리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아이들의 존재가 주는 행복이란 이런 거였지, 지금 나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해진 것들―예컨대 여름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 속에서도 온 몸으로 환희를 노래하니까. 




 지하 1층으로 들어서면 루시드 폴의 노래 <물이 되는 꿈>이 잔잔한 배경음악으로 깔려있다. 작가님의 그림을 통해 나도 덩달아 물이, 파도가, 바람이 되는 꿈을 꾸었다. 병풍 형식의 그림책을 잘못 펼쳤다가 후루룩, 떨어져내려 매우 당황하긴 했지만, 내용에 맞는 형식의 그림책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꿈은 연속적이고, 무엇이 되는 꿈의 목록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 법이니까. 





 이 전시회를 통틀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지하 1층에서 볼 수 있는 <파도야 놀자> 원화였다. 그림책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런 상징성, 표현력, 상상력….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그림책은 꼭 함께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나의 생각은 다시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를 누군가, 내 온 몸과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로 향했다. 나에게 파도는 너, 바다는 너에 대한 내 마음, 고민만 거듭하던 내게 네가 페이지를 넘어왔을 때 내 세상은 온통 너로 물들었어. 





이수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제본선을 주인공의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활용한다. 주인공이 앉아 있는 쪽으로 절대 넘어오지 않는 파도는 바다에 들어갈까 말까 주저하는 주인공의 고민과 저항을 나타내는데, 이 갈등을 주인공의 동작이 아니라 파도를 통해서 표현한다. (생략) 파도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 두 페이지 전체를 적셨을 때 그동안 하얗게 남겨두었던 하늘이 단숨에 온통 파랗게 변한다. 작가는 이 장면을 이전과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암시라고 설명하면서 독자는 여기서 그저 '뭔가' 변했다는 느낌만 받으면 족하다고 말한다.

― 김지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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